[독립운동가] 엄항섭, 문서와 번역으로 전한 독립운동의 뜻…한국사 인물

[독립운동가] 엄항섭, 문서와 번역으로 전한 독립운동의 뜻…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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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은 1898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시기에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다. 194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됐고, 광복 뒤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해 김구를 보좌했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석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가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여주에서 상하이로 향한 독립운동가

엄항섭은 1898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영월, 호는 일파다. 엄대형·엄일파라는 이름을 썼고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엄’, 필명으로는 대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엄세영은 농상공부아문 대신과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아버지는 승지 엄주완이다. 부인 연미당과 장녀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예관 신규식을 찾아가 비밀결사 동제사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국무원 법무부 참사와 임시의정원 지역대표 선출을 위한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을 맡았다. 항저우 지강대학에서 중국어·영어·프랑스어 등을 공부한 것은 훗날 그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주요한 자산이 됐다.

무너질 위기의 임시정부를 지킨 선택

1922년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임시정부는 인력과 자금이 줄어 청사 임대료와 요인들의 끼니까지 걱정해야 했다.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서 일하며 받은 급여로 김구와 이동녕 등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을 도왔다. 일본영사관의 한인 체포 움직임을 알아내고 동포들의 편의를 돕는 일도 취업의 목적이었다.

김구는 당시를 두고 “엄항섭군은 유지청년으로 지강대학 중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엄항섭은 1924년 상해한인청년동맹회 발기인·집행위원·재정부장을 맡았고, 1926년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됐다. 1929년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됐으며,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조직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상해 한국교민단 의경대장을 맡고 자활과 자위를 내건 공평사운동에 참여했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뒤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지냈다.

글과 언어로 수행한 독립운동

엄항섭은 안공근과 함께 김구의 가까운 참모로 활동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0년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통합해 한국독립당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1941년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외무위원장을 맡았으며, 194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됐다. 김구가 미국 육군 OSS와 조선 진공계획을 추진할 때에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김구를 연결하고 OSS 훈련 유치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그의 선전 활동은 번역에서도 드러났다. 김구가 이봉창의 행적과 일왕 저격 의거의 경위를 국한문 혼용 글 「동경작안지진상」으로 작성하자 엄항섭이 이를 중국어로 옮겼다. 번역문은 중국의 《신강일보》와 《중앙일보》에 「진동전세계 동경작안지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환국과 남북협상

엄항섭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해 경교장을 중심으로 김구를 보좌했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김구 명의의 성명과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대부분 작성했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된 뒤 “우리 소년군은 오늘과 같이 길러온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방침인데 일반 사회에서도 많은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밝혔다.

김구·이승만 등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한 엄항섭은 1946년 1월 1일 미군정청에 소환돼 경고를 받았고, 1월 3일에는 복귀를 명한 김구의 교서를 낭독했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장이 됐으며, 1947년 반탁독립투쟁회 중앙집행위원과 국민의회 정무위원·선전부장을 맡았다.

건국 인재를 교육하려고 1947년 설립된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는 강사와 부소장으로 활동했다. 이 양성소는 대한민국건국강령과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토대로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민족문화·농촌문제·여성문제 등을 교육했다.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고 제1기는 2개월,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 과정이었다.

1948년 엄항섭은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을 지지했다.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평양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 15인 회담에 참석했으며, 4월 30일 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한 7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됐다.

분단 속의 마지막과 오늘의 기억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살해되자 엄항섭은 영전에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라는 추모사를 바쳤다. 김구 사후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9년 8월 23일 해체됐다.

엄항섭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 1954년 제네바 회담을 계기로 재북 인사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려고 권태양과 함께 모스크바까지 갔으나 스위스 당국이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평양으로 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에는 오하영·윤기섭·조소앙·송호성·안재홍과 공동 호소문을 발표해 남북협상의 중요성과 실천을 촉구했지만, 그 내용이 6인의 본의와 다르게 왜곡됐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상무위원과 집행위원으로 선임됐으나 1958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됐다. 입북 경위를 두고 자진 월북설도 오랫동안 돌았지만 대체로 본인의 뜻과 달리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3월 1일 엄항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북한은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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