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천, 교장 편찬과 천태종 개립으로 교단 통합 도모…한국사 인물

[고려] 의천, 교장 편찬과 천태종 개립으로 교단 통합 도모…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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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승려 의천(1055~1101)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교장을 간행하고, 1097년 국청사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개립했다. 선과 교의 화합,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한 그의 시호는 대각국사다.

왕자의 자리에서 수행자의 길로

의천은 1055년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문종과 인예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왕후이며, 우세라는 호와 의천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순종·선종·숙종의 친동생이었던 그는 왕실에서 성장했지만 문종이 왕자들에게 출가할 사람을 묻자 스스로 승려의 길을 택했다.

1065년 의천은 외삼촌인 경덕국사 난원을 은사로 출가해 영통사에서 공부했고, 같은 해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불교의 경·율·론 삼장에 머물지 않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폭넓게 익혔다. 스승이 입적한 뒤에는 그 강의를 이어 맡았으며, 1067년 문종에게 우세라는 호와 승통의 직책을 받았다.

당시 고려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존재했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도 심했다. 의천은 계율종·법상종·열반종·법성종·원융종·선적종과 신라시대의 선교 양종을 두루 연구해 불교학 연구의 대가가 됐다. 문종은 그에게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이라는 법호를 내렸다.

송나라에서 넓힌 불교 교학

의천은 송나라 정원법사와 편지로 교류하다가 1085년 선종의 만류에도 제자 수개와 함께 배를 타고 송나라로 향했다. 출국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 조정은 낙진·혜선·도린 등을 수행원으로 보냈고, 송 철종은 관리 양걸을 붙여 의천 일행을 안내하게 했다.

송나라 수도 변경에서는 계성사에 머물며 화엄의 대가 유성법사와 교유했다. 상국사에서는 운문종의 종본을 찾았고, 흥국사에서는 인도 승려 천길상을 만나 인도의 사정과 학문을 들었다. 항주의 대중상부사에서는 정원법사와 만나 화엄경·능엄경·원각경·대승기신론의 사상과 천태·현수 교학을 토론했다. 자변대사와 원소율사를 비롯한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도 담론했으며, 송나라에서 만난 고승은 50여 명에 이르렀다.

의천은 천태산에서 지자대사의 부도에 예배하고 고려에서 천태종을 중흥하겠다는 발원문을 지었다. 영지에서는 대지대사에게 계법을 받았다.

요나라에서도 의천의 명성이 알려졌다. 요 도종은 그에게 계를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으며, 의천이 고려로 돌아간 뒤에도 경책과 차·향, 금과 비단 등을 여러 차례 보냈다.

교장 간행과 불교 지식의 집성

의천은 1086년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다.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은 그는 흥왕사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를 길렀으며, 송나라 학승들과 서적과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정원법사에게는 화엄경과 장경각 건립 비용으로 금 2,000냥을 보냈다.

그의 대표 사업은 불교 주석서를 모아 간행한 교장의 편찬이었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나라·송나라·일본에서 구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고려에 있던 고서를 수집했다. 이 사업을 통해 속장경 4,740여 권이 간행됐다.

의천은 교장의 간행 목록으로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편집했다. 경·율·론 삼장의 정본은 빼고 그 주석서인 장소만 모아 목록으로 만든 것으로, 이런 목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다.

1094년에는 흥원사 주지를 맡았고, 뒤이어 해인사와 흥왕사에서 활동했다. 어머니 인예태후와 형 선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해인사로 물러났지만, 헌종의 요청을 받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흥왕사 주지를 맡았다.

천태종 개립과 교단 통합

1097년 의천은 새로 세워진 국청사의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고 천태종을 개립했다. 천태사상의 회삼귀일과 일심삼관을 통해 선과 교를 화합시키고, 분열된 교단을 통일해 국가의 기반을 굳히려는 선택이었다. 1099년에는 천태종 최초의 승선이 시행됐고, 2년 뒤에는 국가가 천태종 대선을 실시했다.

의천은 국내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 승려와 불교학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사상 교류를 이어갔다. 그의 문하에서는 교웅·징엄·수개를 포함한 고승 160여 명이 배출됐다. 숙종의 아들 징엄도 의천에게 출가해 법통을 이었다.

불교 밖의 국가 정책에도 의견을 냈다. 의천은 숙종 때 화폐 주조를 주장했으며,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해동통보와 삼한통보 등의 동전을 발행해 화폐 유통을 추진했다. 그의 화폐론은 중국에서 얻은 경험과 관련돼 있었다.

의천은 신집원종문류 22권, 석원사림 250권, 간정성유식론단과 3권, 천태사교의주 3권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사후 제자들이 행적과 글을 모은 대각국사문집 23권과 대각국사외집 13권도 편찬됐다. 그는 화엄경 180권을 비롯해 300여 권을 국어로 번역해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술 대부분은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 문집·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와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 등이 전한다.

대각국사로 남은 이름

1101년 10월 3일 숙종은 의천을 국사로 책봉했다. 병세가 깊어진 의천은 문병 온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그해 총지사에서 입적했으며, 당시 향년은 47세이고 법랍은 36세였다.

숙종은 부음을 듣고 조회를 중단하고 임시 공휴일을 정했으며, 직접 다비식을 치렀다. 사리는 영통사 동쪽 산의 석실에 안치됐다. 영통사에는 김부식이 글을 지은 비가 세워졌고, 선봉사에는 임존이 글을 지은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건립됐다. 시호는 대각국사다.

그의 업적으로는 불교 전적 정비와 고려속장경 간행, 송나라 유학을 통한 새 문화 수입, 천태종 창립을 통한 교단 통일과 국가 발전 도모가 꼽힌다. 대한불교천태종은 그를 자신들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 보고, 3대 종조 가운데 한 명으로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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