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색, 성균관 교육 부흥과 성리학 확산…한국사 인물

[고려] 이색, 성균관 교육 부흥과 성리학 확산…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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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1328년에 태어나 1396년에 세상을 떠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해 조선 초 성리학 부흥의 길을 열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이성계의 출사 종용을 끝내 고사했다.

고려 말 학문의 길에 들어서다

목은 이색은 1328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이고, 이색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다. 정몽주·길재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도 꼽힌다.

이색은 1335년부터 책을 읽었으며, 안향과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이제현에게 정주학을 배웠다. 1341년에는 자신보다 열한 살 많은 성총에게 시를 배우고 성균시에 합격했으며, 1348년 원나라로 건너가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귀국한 뒤 원나라에서 접한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을 강의했다. 정몽주·정도전·이숭인·권근·하륜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과거 급제와 개혁 정치

이색은 1352년 공민왕에게 전제 개혁과 국방계획, 교육 진흥, 불교 억제 등 국정 개혁 방안을 담은 건의문을 올렸다. 1353년 고려의 향시와 정동행성 향시에서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됐고, 이듬해 원나라 제과의 회시에서 1등, 전시에서 2등을 차지했다. 원나라에서는 한림 관련 관직과 국사 편수 업무를 맡았으며, 귀국한 뒤 전리정랑·예문응교·춘추관편수관·내서사인 등을 지냈다.

1356년 고려로 돌아온 이색은 인사행정을 맡으면서 정방 폐지를 건의했다. 1357년 우간의대부가 된 뒤에는 유학에 따른 삼년상 제도를 건의해 시행하도록 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이동할 때 왕을 수행했으며, 그 공으로 1363년 신축호종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 밖에도 밀직제학·동지춘추관사·대제학·판개성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국정에 참여했다.

성균관에서 일으킨 신유학의 흐름

이색은 성균관의 교육을 되살리고 신유학을 널리 보급했다. 1367년 판개성부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한 그는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기용하고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했다. 이 활동은 주자학·정주학으로도 불리는 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했으며, 조선 초기 성리학이 성장하는 길을 열었다.

이색은 여러 요직을 지내는 동안 5번 시험을 관장해 132명의 인재를 선발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고려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길재·이숭인과 조선 건국에 참여한 정도전·하륜·윤소종·권근이 함께 배출됐다. 이색에서 정몽주와 길재로 이어진 학문은 김종직과 변계량 등에게 계승됐으며, 권근을 비롯한 문인들의 학문도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는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지향점으로 제시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고 유교와 불교의 융합을 통한 중흥을 주장하면서도,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는 척불론을 강조했다. 도첩제로 승려 수를 제한하는 등 불교의 폐단을 점진적으로 고치려 했다. 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세상의 치란을 성인과 호걸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존왕주의적 유교사관을 견지했다.

왕조 교체 앞에서 지킨 선택

1371년 정당문학이 된 이색은 문충보절찬화공신의 호를 받았고, 1373년 한산군에 봉해졌다. 1375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정당문학과 판삼사사를 지냈으며,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이 되고 우왕의 스승을 맡았다. 1388년 철령위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화평을 주장했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쫓겨난 뒤 이색은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판문하부사가 된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 감국을 요청하며 이성계 세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은 뒤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에 유배됐고, 함창으로 옮겨졌다가 이초의 옥에 연루돼 청주의 옥에 갇혔다. 수재가 발생하자 다시 함창에 안치됐다.

위화도회군 이후의 전제 개혁 논의에서는 사전 혁파에 반대했는데, 이는 많은 토지를 보유한 계층으로서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다. 또한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으면서 제자였던 정도전·조준·남은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됐다.

1391년 석방된 이색은 한산부원군에 봉해졌지만, 1392년 정몽주 피살 사건에 연루돼 금주로 추방됐다. 이어 여흥과 장흥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한 뒤 풀려났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는 1395년 그를 한산백에 봉하고 관직에 나올 것을 권했으나, 이색은 망한 왕조의 사대부로서 고향에 묻힐 뿐이라는 뜻을 밝히며 끝내 거절했다. 그는 1396년 여강으로 가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문장과 교육으로 남은 이름

이색의 저술로는 《목은시고》와 《목은문고》가 전한다. 《목은고》 55권에는 4,370개 제목 아래 1만여 수의 시와 244개 제목의 문장이 실렸다. 그의 시문은 고려 말 지식인 사회와 정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사료로 평가되며, 이색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동방의 대문호로 불렸다.

1396년의 《태조실록》은 이색을 두고 “이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웠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중략)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라고 기록한다. 류성룡은 훗날 그를 삼국시대 위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은 후한의 양표에 견주었다.

이색은 장단의 임강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한산의 문헌서원, 영해의 단산서원에 제향됐다. 그는 성균관 교육을 부흥시키고 수많은 학자를 길러 성리학의 확산에 기여했으며, 왕조가 바뀐 뒤에도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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