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와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다. 1937년 이후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평양 감옥에서 미결수로 5년여 옥고를 치렀고,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했다.
웅천에서 시작한 신앙과 배움
그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현성은 지역 아전 출신으로 농사를 지었으며, 어머니 조재선은 주현성이 첫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한 부인이다. 주현성은 첫 부인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고 조재선과의 사이에서 주기철을 낳았다. 주기철의 본래 이름은 주기복이며, 세례를 받은 뒤 “기독교를 철저히 믿는다”는 뜻을 담아 주기철로 바꾸었다. 아호는 소양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운 그는 1906년 웅천 개통학교에 들어가 1912년까지 공부했다. 1910년 성탄절부터 맏형 주기원을 따라 웅천교회에 다녔다. 1912년 웅천을 찾은 이광수의 강연을 들은 뒤, 이광수가 교사로 있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1913년 입학해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1916년 4월에는 총독부 설립 인가를 받지 않은 신설 학교 조선예수교대학교 상과에 진학했지만, 안질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7년 10월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김해읍교회 교인이던 안갑수와 결혼했으며, 1919년 이전에는 웅천교회 집사가 되었다. 1919년에는 남학회를 조직해 3·1 운동에 참여했다.
목회자의 길과 교회 활동
주기철은 1920년 9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중생의 체험을 했으며, 같은 해 11월 웅천교회 사경회에서도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이 무렵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921년 12월 제12회 경남노회에 신학 공부를 청원해 허락받았고, 입학시험을 거쳐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신입생 때 학생회 부서기를 맡았으며, 1923년 봄부터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로 일하며 목회에 들어섰다.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 제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그는 같은 달 30일 제20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6년 1월 10일 부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고, 경남성경학원 강사로도 활동했다. 훗날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조용학과 신사참배 거부로 5년간 옥고를 치른 손양원도 이곳에서 주기철에게 성서를 배웠다. 그는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에서 목회했고, 이후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로 옮겼다.
1928년 1월 제24회 경남노회와 1930년 6월 제28회 경남노회에서 부노회장으로 선출됐고, 1932년 1월 제3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이 된 뒤 1933년 1월 재선됐다. 1933년 이후에는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설교했다. 1933년 5월 부인 안갑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8월에는 부친이 별세했다. 그는 1935년 자신이 담임하던 마산교회의 집사 오정모와 재혼했다.
1936년 7월 은사 조만식의 요청과 평양 산정현교회의 초청을 받아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 실천을 강조한 일사각오 설교로 기독교 신앙과 독립정신을 북돋우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다.
신사참배 거부와 반복된 검속
일제가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은 폐교될 위기에 놓였다. 주기철은 1938년 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평양경찰서에 처음 구속돼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38년 4월 1차 검속 때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6월 풀려났고, 같은 해 8월 다시 붙잡혔다가 1939년 1월 29일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됐다.
산정현교회로 돌아왔을 때는 혼자 목회하기 어려울 만큼 건강이 악화돼 번하이젤 선교사가 저녁 예배를 계속 도왔다. 일제 경찰은 1939년 10월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가 주일 예배에서 설교하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주기철은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했고 같은 달 중순경 다시 구속됐다. 1939년 12월 19일에는 신사참배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양노회에서 목사직 파면을 당했다.
그는 1940년 2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을 주제로 생전 마지막 설교를 했다. 1940년 4월 20일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같은 해 9월 20일 새벽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거부자 검거가 실시될 무렵 다시 체포됐다.
옥중 순교와 독립운동가의 이름
주기철은 평양 감옥에서 미결수로 5년여 옥고를 치렀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1944년 4월 13일 병감으로 옮겨졌으며, 4월 21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으로 면회한 뒤 그날 밤 9시경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교했다.
1963년 주기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는 한상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대표한 인물로 꼽히며, 손양원과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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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주기철」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주기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