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명배우가 펼친 또 하나의 데뷔
21일 영국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60년에 걸쳐 작곡한 관현악곡 12곡을 담은 첫 녹음 앨범 ‘라이프 이즈 어 드림’(Life is a dream)을 발표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 받은 세계적인 배우가 89세에 작곡가로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정식 음반에 새겼다는 점에서, 이번 발매는 단순한 유명인의 외도가 아니라 오랜 창작 기록을 공개하는 순간에 가깝다.
연합뉴스가 전한 앨범 구성에 따르면 수록곡들은 최근 한 시기에 집중해 만든 작품이 아니다. 홉킨스가 무려 60년에 걸쳐 써온 음악 12곡이 한 장에 모였다. 배우로 살아온 시간과 작곡을 이어온 시간이 사실상 나란히 흘렀다는 의미다. 대중에게는 영화 속 얼굴과 목소리로 익숙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음악이 수십 년 동안 또 다른 창작 언어로 자리해온 셈이다.
앨범 제목인 ‘삶은 꿈’은 홉킨스의 예술 인생을 압축한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꿈이었다고 표현했고,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데카 클래식스와의 계약을 평생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이미 확고한 명성을 얻은 예술가에게도 새로운 장르에서 작품을 공식 발표하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도전인지를 보여준다. 완성된 경력의 연장이 아니라, 오래 간직한 바람을 뒤늦게 세상과 나누는 새로운 출발로 읽힌다.
“음악은 첫 번째 바람이었다”
홉킨스는 데카 클래식스를 통해 “음악은 나의 첫 번째 바람이자, 첫 번째 소망이었다”고 밝혔다. 배우로서 거둔 성취보다 앞선 곳에 음악을 놓은 표현이다. 그는 앨범에 담긴 일부 작품이 수십 년 동안 자신과 함께해왔으며 지금도 그 곡들로 돌아가곤 한다고 설명했다. 곡들이 한때의 관심으로 쓰였다가 보관된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반복해서 마주한 창작의 근원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앨범의 핵심은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음악도 만들었다’는 놀라움에만 있지 않다. 60년 동안 작품을 품고 다듬어온 지속성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 영화 촬영과 연기 활동으로 대중 앞에 서는 동안에도 관현악을 위한 창작이 이어졌고, 서로 다른 시기에 태어난 12곡은 이제 하나의 앨범 안에서 그의 시간을 연결한다. 작품마다 구체적인 탄생 배경은 공개된 내용만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전체 음반이 긴 예술적 자화상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특히 첫 녹음 앨범이라는 형식은 악보로 존재하던 창작물을 실제 소리와 연주로 고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홉킨스 개인의 기억 속에 머물렀던 음악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독주자들의 해석을 거쳐 청중에게 전달되는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배우의 표정과 대사가 관객의 해석을 만나듯, 이번에는 그가 쓴 음표가 연주자와 감상자의 경험을 만나게 된다. 매체는 달라졌지만 창작자와 관객을 잇는다는 예술의 구조는 그대로다.
두다멜과 필하모니아가 완성한 관현악의 규모
앨범은 올해 4월 영국 런던의 알렉산드라 팰리스에서 녹음됐다. 세계적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참여했고,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홉킨스의 관현악 작품을 소리로 구현했다. 피아니스트 세르지오 티엠포와 첼리스트 그레고리오 니에토도 힘을 보탰다. 오랜 세월 개인적으로 이어온 작곡 작업이 국제적인 클래식 연주진과 만나 대규모 녹음 프로젝트로 완성된 것이다.
홉킨스는 이번 음악적 여정에서 두다멜이 자신의 예술성에 핵심적인 부분을 이뤘다며 깊은 감사와 존경을 전했다. 두다멜 역시 홉킨스를 “하나의 매체를 넘어서는 창작의 목소리를 지닌 보기 드문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의 작품을 들을 때마다 아름다움과 장인정신, 작품 안에 살아 숨 쉬는 경이감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유명 배우라는 배경보다 실제 작품에서 감지한 음악적 특질을 강조한 평가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 협업은 앨범의 성격을 선명하게 만든다. 홉킨스의 이름에 기대어 간단히 구성한 기념 음반이 아니라, 관현악곡을 전문 연주진과 함께 본격적인 녹음물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중심에 놓인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합주에 피아노와 첼로 연주자가 더해지고, 두다멜이 전체 음악의 방향을 이끌면서 12곡은 개인적 창작에서 공동의 예술 작업으로 확장됐다. 분석적으로 보면 이번 앨범은 한 사람의 숨겨진 재능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긴 시간 축적된 작품이 협업을 통해 공적인 문화 콘텐츠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크린 밖에서 다시 만나는 앤서니 홉킨스
홉킨스는 이미 배우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인물이지만, ‘라이프 이즈 어 드림’은 익숙한 명성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관객이 영화에서 접해온 그의 집중력과 표현력이 음악에서도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기 때문이다. 두다멜이 언급한 아름다움과 장인정신, 경이감은 이번 음반을 감상할 때 주목할 핵심 단서가 된다. 배우의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12곡 자체에 귀를 기울일수록 앨범의 진정한 의미가 또렷해질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이번 발매는 창작에 늦은 시점이란 없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홉킨스에게 음악은 갑자기 선택한 새로운 취미가 아니라 60년 동안 곁에 둔 첫 번째 소망이었다. 오랫동안 돌아보던 작품을 89세에 첫 녹음 앨범으로 세상에 내놓은 과정은, 예술가의 정체성이 하나의 직업이나 장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이룬 성취가 새로운 표현을 막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오늘 한국의 음악·영화 팬들이 이 소식에 주목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의 60년 작곡 인생이 세계적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만나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앨범이 됐기 때문이다. 언어권과 국적을 넘어 알려진 얼굴이 이번에는 대사가 아닌 관현악으로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라이프 이즈 어 드림’은 전 세계 팬에게 앤서니 홉킨스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특별한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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