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에서 독립운동가로
해공 신익희는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평산 신씨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여구이며, 중국에서는 임방호와 왕해공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유학 중 한국인 학생들의 모임에서 활동하고 기관지 『학지광』 발간을 주도했다.
귀국한 신익희는 중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17년부터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과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했다. 어려운 개념을 쉬운 말로 설명해 학생과 청강생이 몰렸다고 전한다. 1913년에는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어 계몽 활동에도 나섰다.
3·1운동과 상하이 망명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신익희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주와 베이징, 상하이를 오가며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했고, 국내에서는 최린·송진우·이상재·이승훈 등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의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해외 연락을 맡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서울 시내에 배포하도록 했다. 참여 사실이 드러나 지명수배되자 교사와 교수 직책을 내려놓고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3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독립임시사무소에서 활동했다. 이동녕·이시영·조완구·신규식 등과 임시정부 조직을 논의했고,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뒤 임시의정원법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는 일에 관여했다. 이시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총장들이 아직 상하이에 도착하지 않은 초기에는 신익희 등 각 부서의 차장들이 실제 행정을 담당했다.
임시정부를 지탱한 행정과 군사 구상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초대 내무차관을 비롯해 법무차장·외무차장·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내무부장 등을 맡았다. 국무원 비서실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일했다. 임시정부의 존립 방식을 둘러싸고 세력이 갈라졌을 때에는 김구·이동녕·조소앙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는 쪽에 섰으며, 1922년 김구·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그는 독립운동이 군사행동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1923년 중국 국민당군 장군 호경익을 찾아 한중 합작을 논의했고, 중국군 육군 중장과 사단 참모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중국·러시아 청년들로 특수부대 편성을 추진했다. 한국인 청년들에게 받은 독립운동 자금 가운데 1천 원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호경익이 사망한 뒤 후임자 악유준이 아편 판매로 무기 자금을 마련하라고 요구하자 신익희는 “이 나라를 구하는 독립전쟁이 아무리 급해도 사람의 피를 말리는 아편 중개를 하라는 것은 한국의 혁명가를 모독하는 것이오”라고 항의하고 중국군에서 물러났다. 한중 합작으로 군사행동을 실현하려던 그의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33년에는 김규식·김원봉 등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고, 1935년 민족혁명당 창립에 참여했다. 1937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뒤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고 한국광복진선 결성에도 참여했다. 1940년 임시정부 각료가 됐으며, 1942년 외교연구위원과 외교위원회 부회장을 맡았다. 1944년 내무부장에 선출됐고, 1945년 2월에는 내무부 직속 경위대를 조직했다. 광복 뒤에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귀국 문제를 중국 정부·주중 미군 당국과 교섭해 성공했지만, 임시정부가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정부 수립과 의회 정치
신익희는 1945년 12월 귀국한 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을 맡았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과 점차 다른 길을 택해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승만에게 접근했다. 1946년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됐으며 1947년 의장을 맡았다.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는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이 시기 활동에는 어두운 대목도 있었다. 1946년 신익희가 이끈 정치공작대와 백의사는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폭탄 투척을 추진했으며, 평양의 3·1절 행사장과 최용건·김책·강양욱의 집을 공격했다. 같은 해에는 특별정치부대를 동원해 미군정의 정부 건물을 접수하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정보가 미군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실패했다. 존 하지는 그에게 다시 일을 벌이면 사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신익희는 초대 국회부의장이 됐다. 국회의장이던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8월 국회의장으로 선출됐고, 제2대 국회에서도 의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친이승만 성향의 대한국민당을 창당했지만 정부 수립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해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으며,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했다. 1955년 장면·조병옥·윤보선·박순천 등과 민주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이 됐다.
국민대학 설립과 마지막 선거
신익희는 귀국 직후부터 대학 설립을 추진해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의 인가를 받은 국민대학관을 세웠다. 처음에는 성인을 위한 야간대학으로 운영했고 뒤에는 주간반도 편성했다. 그는 설립자이자 이사장, 초대 학장을 맡았으며 민족학을 강의했다. 정계 활동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1954년 박이순에게 학장직을 넘겼다. 이 교육기관은 오늘날 국민대학교로 이어졌다.
1956년 신익희는 민주당의 제3대 대통령 후보가 됐다. 진보당 후보 조봉암과 단일화를 협의해 조봉암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신익희를 지지하는 내용의 합의가 마련됐지만 발표 전에 비극이 닥쳤다. 5월 2일 한강 백사장 유세 뒤에도 전국 순회 일정을 이어가던 그는 5월 5일 장면과 호남선 열차를 타고 유세지로 향하던 중 쓰러졌다.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한 뒤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며, 정확한 사망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거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무효표 185만여 표가 나왔다. 그는 서울 우이동에 안장됐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2008년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으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꼽을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한편 정치인 이철승은 그를 현실주의적인 융통성을 지닌 자유주의자 정치인으로 평하면서, 자유로운 융통성과 중도노선 때문에 억측과 오해를 받았고 잦은 정치노선 변경과 변심으로 비판을 받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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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신익희」 — 위키백과 기여자, CC BY-SA 4.0
- 신익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