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혜경궁 홍씨, 왕실 비극을 기록한 《한중록》의 저자…한국사 인물

[조선] 혜경궁 홍씨, 왕실 비극을 기록한 《한중록》의 저자…한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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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차남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로, 사도세자의 죽음과 60년에 걸친 자신의 궁중 생활을 돌아본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뒤 혜빈이라는 빈호를 받았고, 1899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면서 헌경왕후가 되었으며 이후 헌경의황후로 격상되었다.

세자빈이 된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는 1735년 영조 11년 음력 6월 18일 한성부 반송방에서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조의 외6대손이며, 아버지 홍봉한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에게서 이어진 가계에 속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혜경궁이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고, 출생 뒤에는 아들 부부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말했다.

1743년 사도세자의 배우자로 간택된 그는 이듬해인 1744년 10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홍현보가 예조판서까지 지냈지만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언니의 혼인과 자신의 출가 때 충분한 혼수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훗날 《한중록》에 적었다. 가례 때에는 얼굴도 모르던 친척들까지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영조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아버지 홍봉한이 그에게 《소학》과 《내훈》, 《어제훈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의소세손과 훗날 정조가 되는 이산을 낳았다. 영조가 큰 기대를 걸었던 첫 손자 의소세손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2년 만에 둘째 아들 이산이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혜빈의 삶

1762년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면서 왕실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가산을 잃어 자립하기 어려워지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세워 형조에 글을 냈다. 영조는 직접 국문한 뒤 윤5월 13일인 7월 4일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뒤주에 가두었다.

사도세자는 폭염 속에서 8일 동안 뒤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다가 윤5월 21일인 7월 12일 굶어 죽었다.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며느리 홍씨에게 혜빈이라는 호를 주었다. 혜빈은 이후 사가에 머물렀다.

이 사건의 정치적 배경을 두고는 영조가 노론을 견제하려고 키운 홍봉한 계열의 외척 탕평당과 탕평책에 반대하던 노론 세력의 충돌 속에서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는 주장도 있다. 반탕평파가 홍봉한을 공격하려고 그의 약점인 사도세자 문제를 부각했다는 설명이며, 당시 상소들에는 세자의 비행을 감췄다는 이유로 홍봉한을 비판한 내용이 상당수 등장한다. 홍봉한은 뇌물까지 주며 사태를 덮으려 했으나 나경언의 고변으로 더는 수습하기 어려워졌고, 영조가 왕실을 위해 아들을 포기하고 손자를 지키고자 홍봉한에게 명을 따르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세손 이산을 지킨 어머니

1769년 세손 이산이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기방에 드나든 일을 화완옹주와 홍국영이 목격해 혜경궁에게 알렸다. 그는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은 길을 갈까 염려해 아버지 홍봉한에게 수습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자 단식으로 맞섰다. 결국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 보내고 세손에게 나중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이 일은 왕조실록에는 없으며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홍봉한은 1770년 무렵 김귀주와 정후겸의 공격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난 뒤 봉조하 직함으로 교외에서 살았다. 이복동생 홍인한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정조는 홍인한이 형을 배신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홍봉한은 사도세자 생전부터 정순왕후의 외척 가문과 벌인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김귀주 계열은 정조 즉위 초기와 정조 사후에도 그를 계속 공격했다. 홍봉한과 세손 이산이 사도세자의 추숭을 두고 사적으로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알려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다.

1775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자 홍인한은 강하게 반대했다.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산 홍인한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사사되었다.

국왕의 어머니와 《한중록》

1776년 영조가 83세로 세상을 떠나자 대리청정 중이던 세손 이산이 25세에 조선 제22대 왕 정조로 즉위했다. 정조는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어머니 혜빈에게는 혜경궁이라는 궁호를 바쳤다. 혜경궁은 당시 왕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왕실 서열에서는 자신보다 10살 아래인 대비 정순왕후에 이어 제2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아니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이 때문에 혜경궁의 공식 신분은 생전에 세자빈에 머물렀지만, 정조는 생모를 자궁이라 부르며 사실상 왕대비에 해당하는 대우를 했다. 혜경궁은 1778년 효강, 1783년 자희, 1784년 정선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회갑을 맞은 1795년에는 휘목이 더해졌다.

혜경궁은 정조와 순조의 재위기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과 60년 동안 경험한 궁중 생활을 자전적으로 기록했다. 《한중록》은 한 번에 완성된 책이 아니라 십수년에 걸쳐 서로 다른 목적과 수신자를 두고 여러 차례 작성된 글을 후대의 누군가가 모아 엮은 것이다. 정사에서는 알 수 없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왕실 내부의 이야기, 인물들의 성격, 사건과 대화가 상세히 담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5년 회갑 때에도 회고록을 썼으며, 정조가 죽은 뒤 벽파의 공격으로 친동생이 사사되고 아버지가 다시 역적으로 몰리자 집안을 변호하는 내용도 남겼다. 정조 생전의 말과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며 친동생의 죄목과 아버지를 향한 공격을 항목별로 반박했고, 김귀주 계열과 벽파를 향한 원한도 글에 드러난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한 뒤에는 책 제목을 《한중록》(閑中錄)에서 《한중록》(恨中錄)으로 고쳤다. 1910년부터 일부 한국 사학자들은 이 글의 집필 목적이 자신과 친정을 변호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추존과 오늘날의 기억

혜경궁은 1805년부터 담현증을 앓아 오래 병석에 있었다. 1개월간 입진을 받은 뒤 의약청이 철수했으나 병이 재발했고, 1815년 순조 15년 음력 12월 15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생을 마쳤다. 양력 날짜는 1816년 1월 1일이다. 사후 헌경빈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총명하고 예지가 있음을 헌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경이라 한다는 뜻이 붙었다.

순조 즉위 직후에는 정조가 했던 약속을 근거로 친정의 신원을 요구했다. 1814년 친정 가문은 신원과 복권을 받았다. 그는 홍봉한이 죽기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과 이심도 등의 처벌도 요구했으며,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졌다.

1854년에는 유정이라는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 광무 3년 경연특진관 서상조가 장헌세자의 왕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승인을 받았다.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이 되면서 혜경궁도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장종이 다시 장조의황제로 격상되자 헌경의황후가 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이며, 남편 장조와 함께 경기도 화성의 융릉에 묻혔다.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 효의왕후의 건릉이 자리한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로 왕실의 비극과 정치적 충돌을 겪었으며, 그 경험을 《한중록》에 남겼다. 자신과 친정을 위한 변론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함께 있다. 그의 삶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로도 여러 차례 다뤄졌다.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견미리가, 2015년 영화 《사도》에서는 문근영이,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강말금이 혜경궁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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