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현인,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불린 1950년대 대표 가수

[현대] 현인,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불린 1950년대 대표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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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불리는 현인(1919년 12월 14일~2002년 4월 13일)은 해방 이후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부른 가수로,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평가된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947년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대중가요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2002년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에서 시작된 음악의 길

현인은 1919년 12월 14일 부산에서 현명근과 오봉식의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이며 본명은 현동주다.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고, 아버지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가 살던 동래를 오가며 성장했다. 아버지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난 뒤에는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건너갔다. 그곳의 히비야공회당에서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의 독창회를 관람하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

1931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현인은 영어와 일본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학창 시절 장티푸스로 생사의 고비를 겪었으며,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현인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위해 도쿄로 갔지만 진로를 바꾸어 우에노음악학교로도 불린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했다. 음악학교 진학을 너무도 불쾌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 지원을 끊자 막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했고, NHK 합창단 모집에 응시해 단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성악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했다.

중국 공연과 해방 뒤의 재출발

1939년 창씨개명 당시 사용한 이름은 고토 진이었다. 훗날 사용한 예명 현인은 고토라는 성을 현으로 바꾸어 만든 이름이다. 그는 1943년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극단에서 활동했으며, 베이징과 항저우 등지에서도 공연했다. 일본 패전 뒤에는 베이징의 비밀 형무소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고, 1946년 귀국했다.

귀국 후 현인은 미군 위문 공연에 참여하고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했다. 1947년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를 받아 대중가요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뉴스맨스클럽 무대에서 이름을 알렸고, 유호가 가사를 쓰고 박시춘이 곡을 만든 「신라의 달밤」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전쟁과 피란의 시대를 노래한 대표작

「신라의 달밤」에 이어 현인은 한국전쟁 전까지 「비 내리는 고모령」과 「고향만리」를 불렀다. 1948년에는 「럭키서울」과 「베사메무초」를 발표했으며, 「베사메무초」는 현동주라는 이름으로 번안했다. 1949년에는 해방 후 최초의 음악영화인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선정돼 출연하고 주제가도 불렀다. 「서울야곡」은 직접 작사·작곡한 곡이다.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무초」와 「꿈 속의 사랑」을 번안해 불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1952년에는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인은 군예대로 활동하며 군부대 위문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전쟁 중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를 발표했고, 「굳세어라 금순아」와 「인도의 향불」, 「꿈 속의 사랑」도 지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 초에는 부산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24일에는 동아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꾸려 「멍기의 노래」로 무대에 올랐고, 1952년 6월 1일에는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에 출연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온 현인은 박시춘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해 다시 큰 인기를 모았다. 1950년대 후반에도 「나포리 맘보」와 「불국사의 밤」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모았다. 1958년에는 전영주가 부른 「아리랑 맘보」를 작곡했다. 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했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무대의 굴곡과 귀환

현인은 1957년 두 번째로 결혼한 아내 박정혜와 이혼했고, 1959년에는 봉봉쇼단이 재정난으로 6개월 만에 파산했다. 1960년대에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74년 뉴욕시티로 이민해 세 번째로 결혼하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고, 1981년 귀국했다.

귀국한 현인은 1981년 중반부터 1999년까지 「가요무대」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출연했다. 1999년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활동을 중단했으며, 같은 해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1990년 KBS특별가요대상과 1996년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본상 골든디스크 부문도 수상했다. 2002년 4월 13일 당뇨 합병증으로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대중가요사를 잇는 목소리

현인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의 트로트와 신민요를 소화하는 한편, 미국식 대중가요가 개화한 1960년대의 팝 스타일 가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해방 이래 앨범을 발표하여 데뷔한 가수는 현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제1호 가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2003년에는 고향 부산 영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를 새긴 현인노래비가 동상과 함께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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