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신으로 성장한 서희
서희(徐熙)는 고려(918~1392)의 문신으로, 942년에 태어나 998년 음력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집안에는 특별한 태몽 이야기가 전한다. 외가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 용이 구름에 걸려 추락하다가 바다의 신에게 도움을 받아 용궁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서희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고 지리에 밝았으며 무예에도 능했다. 훗날 거란 장수와 국경과 영토 문제를 논할 때 지리와 역사적 계승 관계를 근거로 주장을 펼친 행적은 이러한 성장 과정과 함께 주목할 만하다.
조부는 정2품 아간대부 서신일이며, 조모는 홍찬의 딸인 합천 홍씨였다. 아버지 서필은 901년에 태어나 965년에 세상을 떠났고 종1품 내의령을 지냈다. 어머니는 평양 황씨이며 부인은 청주 한씨였다. 장남 서눌은 종1품 문하시중에 올랐고, 서눌의 딸 원목왕후는 고려 현종의 제6비가 되었다. 차남 서유걸은 정2품 상서좌복야였으며, 그 아들 서정은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서존은 태원군이자 정3품 병부상서였다. 서희의 다른 아들로는 아명이 서유행이었던 서주행과 정3품 장야서령 서유위가 전한다. 서주행과 초계 주씨 사이의 아들 서한은 종3품 군기소윤이었고, 서유위의 아들은 서면이었다.
서희는 960년, 고려 광종 11년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광평원외랑과 내의시랑 등을 거쳤으며 983년에는 병관어사가 되었다. 그는 뒤에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태보와 내사령에 이르렀다.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뒤 여러 직책을 거쳐 국가의 핵심 관료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고려사에서 특별하게 만든 사건은 관직의 높이만이 아니었다. 993년 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맞아 전쟁과 영토 상실의 위기에 놓인 고려를 외교 담판으로 돌려세운 일이 그의 생애를 대표한다.
80만 대군의 위협과 흔들린 고려 조정
993년 요 성종은 장수 소손녕에게 군대를 맡겨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왔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위협하며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다.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봉산군에서 고려군과 처음 교전했고, 고려군 선봉장을 붙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 성종은 박양유·서희·최량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지만 고려군은 패배했고, 오늘날 청천강 이북 지역에 해당하는 봉산군을 빼앗겼다. 거란의 압도적인 병력 주장과 실제 패전 소식이 한꺼번에 전해지면서 고려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성종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보내 화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화의보다 항복을 요구했다. 이몽전이 침략한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고려가 백성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천벌을 주러 왔다고 답했다. 이몽전이 돌아와 이 내용을 보고하자 조정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일부 신하는 투항을 주장했고, 다른 신하들은 땅을 떼어 거란에 넘기는 할지론으로 전쟁을 피하자고 했다. 성종 역시 서경의 쌀을 버리도록 칙명을 내렸다. 적에게 군량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막으려는 결정이었지만, 서희는 이 조치가 성을 지키고 싸울 기반까지 스스로 없애는 일이라고 보았다.
서희는 전쟁의 승패가 단순히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회를 살펴 움직이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먹을 것이 충분해야 성을 지킬 수 있고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는데, 어찌 갑자기 쌀부터 버리려 하느냐고 물었다. 또한 당장 서경 이북의 땅을 내준다 해도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삼각산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거란이 끝없는 욕심으로 계속 영토를 요구한다면 그때마다 모두 내줄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그는 거란이 말한 80만 대군을 그대로 믿지 않고, 고려를 겁주기 위해 부풀린 공갈이라고 판단했다. 민관 이지백도 이러한 서희의 견해에 동조했다.
절을 강요한 장막에서 기선을 잡다
서희는 거란의 목적이 단순히 고려 영토를 점령하거나 소손녕이 처음 내세운 명분대로 천벌을 내리는 데만 있지 않으며, 고려와 강화를 이루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직접 소손녕이 머무는 봉산군의 장막으로 가서 담판에 나섰다. 그런데 협상은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의례 문제로 충돌했다. 거란 측은 서희에게 먼저 대국의 귀인에게 절하는 예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거듭 빨리 절하라고 위협적으로 압박했지만, 서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지만, 서로 다른 두 나라의 대신이 대면한 자리에서 한쪽만 절하는 예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크게 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숙소로 돌아간 뒤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상대의 장막에 들어간 사신이면서도 고려 대신으로서의 지위와 양국 관계의 대등함을 포기하지 않은 대응이었다. 소손녕은 내심 서희의 인품을 비범하게 여겼고, 결국 두 사람은 뜰에서 서로 마주 절한 다음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비상식적인 예를 고집해 서희를 압박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희가 협상의 기선을 잡게 되었다.
대화가 진행되자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며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희는 고려가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했고, 서경을 국도로 정했다고 맞섰다. 그는 영토의 경계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거란의 동경이 고려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한다며, 고려가 거란을 침범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상대가 제시한 역사적 명분을 피하거나 수세적으로 해명하는 대신, 고려의 국호와 서경의 위상을 들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거란의 본심을 읽고 강동 6주의 길을 열다
첫 번째 명분이 반박되자 소손녕은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왜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서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실질적인 목적이 드러났다. 거란은 송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배후에 있는 고려가 송을 지원하거나 거란을 공격할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이를 미리 막으려 했다.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통해 거란의 속마음을 파악했다. 거란이 고려의 즉각적인 멸망만을 원했다면 송과의 교류 문제를 협상 의제로 제기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국교 문제는 전쟁을 멈출 수 있는 돌파구가 되었다.
서희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 국교가 통하지 않는 이유가 고려의 거부 때문이 아니라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어 고려가 여진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해 그곳에 성과 보를 쌓아 통행로를 열 수 있다면, 어찌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처음 목표는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거란이 요구한 국교 수립을 가능하게 하려면 고려가 여진이 차지한 지역을 확보하고 방어 시설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할 기회까지 협상안 안에 포함했다.
결국 서희는 거란과의 협상에 성공했다. 고려는 서경 이북을 떼어주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동 6주의 땅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 소손녕은 철수하면서 서희에게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선물했다. 고려군이 첫 교전에서 패하고 조정에서 투항론과 할지론이 제기되던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결과는 출발점과 크게 달랐다. 서희는 상대가 내세운 병력의 규모와 위협적인 말에 끌려가지 않고, 역사적 계승 관계·국경·교통로·국교라는 의제를 차례로 연결해 군대의 후퇴와 영토 확보의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냈다.
임금에게도 원칙을 굽히지 않은 관료
서희의 강직함은 거란과의 담판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성종이 서경에 행차했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즐기려 하자, 서희는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상소하고 간언해 중지시켰다. 또 왕의 행차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성종이 서희가 머물던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지존인 임금이 머물 만한 곳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성종이 그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했을 때도 자신의 술을 감히 드릴 수 없다고 답했고, 결국 막사 밖에서 왕이 내린 어주를 올렸다. 임금에 대한 예를 지키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은 모습이다.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의 일곱 가지 일’을 논했을 때에는 그 내용이 임금의 비위를 거슬렀다. 성종이 정우현을 내치려 하자 서희는 오히려 그의 논의가 매우 적절하다고 변호하고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 결과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었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동료 관료의 직언을 외면하지 않고, 그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자 책임까지 떠맡은 일화는 서희가 외교 현장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원칙에 따라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996년 서희가 병을 얻어 사찰 개국사에서 요양하자 성종은 직접 그곳을 찾았다. 왕은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는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며 그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서희는 998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들은 왕은 크게 슬퍼하며 베 1,000필,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다 200각, 대다 10근, 전향 300량을 부의로 내렸다. 사후 시호는 장위(章威)였으며, 1027년 고려 현종 18년에는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쟁을 외교의 성과로 바꾼 이름
서희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패전 직후의 불리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요구를 정확히 분석해 결과를 뒤집었다는 데 있다. 그는 거란의 80만 대군이라는 위협을 공갈로 판단했고, 군량을 버리거나 국토를 떼어주는 선택에 반대했다. 담판장에서는 일방적인 절을 거부해 고려 대신의 지위를 지켰으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논리로 거란의 영토 주장을 반박했다. 이어 송과의 교류를 문제 삼는 소손녕의 발언에서 거란의 실제 우려를 읽고, 여진을 몰아낸 뒤 성과 보를 쌓아 양국의 길을 열겠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그 결과 고려는 교전을 계속하지 않고 거란군을 물러나게 했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확보할 기회까지 얻었다. 이 때문에 서희는 단순히 말을 잘한 사신이라기보다 군사 상황, 지리, 역사적 계승 의식과 상대국의 전략적 목적을 하나의 협상 논리로 묶은 문신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야기는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배우 한범희가, 《천추태후》에서 2009년 배우 임혁이 연기하며 다시 소개되었다.
오늘날에도 서희가 기억되는 이유는 나라가 크게 흔들리던 순간에 공포나 성급한 양보보다 사실과 논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싸움의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냈고, 항복이나 영토 포기 대신 철수와 강동 6주의 기회를 이끌어냈다. 동시에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고 다른 관료의 정당한 논의를 변호한 행적까지 남겼다. 서희의 생애는 외교가 단순히 충돌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의 원칙을 지키면서 위기를 더 나은 결과로 바꾸는 책임 있는 판단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