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가르침, 무장의 길을 열다
최영(崔瑩, 1316~1388)은 고려(918~1392) 말기에 장군과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본관은 동주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 어머니는 봉산 지씨였다. 고려 후기의 학자로 집현전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으로, 문신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배경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뛰어났던 그는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혀 무장의 길을 선택했다. 훗날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와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고려 최고위 재상직인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삶을 관통한 원칙은 열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훈이었다. 최원직은 아들에게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당부했고, 최영은 이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여색과 재물을 멀리했으며 사치와 축재에도 부정적이었다. 김용이 죽은 뒤 그가 소유했던 묘아안정주라는 보옥이 조정에 바쳐져 관리들이 돌려 보며 감탄하자, 최영은 김용의 큰 뜻을 그런 물건이 더럽혔는데 무엇이 대단해 구경하느냐는 취지로 비판했다. 관직에 오르는 방법을 묻는 사람에게 “상공을 배우면 된다”고 답한 일도 당시 매관매직의 세태를 비꼰 말로 전해진다.
검소함을 보여주는 일화도 남아 있다. 당시 권세가들은 서로를 저택으로 초대해 진기한 음식을 차린 성대한 연회를 열곤 했다. 최영은 재상들을 자신의 집에 부른 뒤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을 내놓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기장쌀을 섞은 밥과 여러 나물만 차려 내놓았고, 오래 기다리며 허기진 재상들은 음식을 남김없이 먹은 뒤 최영의 집에서 먹은 것이 가장 맛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그는 이것도 병사를 부리는 한 방법이라고 답했다. 평생 군문에 있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에 불과했다는 《고려사》의 평가는 그가 군대 내부의 파벌과 거리를 두고 임무에 집중했던 성향을 보여준다.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경을 되찾다
최영은 처음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들어가 무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했고, 왕을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우달치에 임명되었다. 1352년 공민왕 원년 음력 9월에는 조일신의 역모를 안우·최원 등과 함께 진압했다. 이 공으로 호군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고려는 80년 넘게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중국 대륙에서는 원의 통치에 맞선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영의 군사 활동은 이러한 국제 질서의 격변 속에서 시작되었다.
1354년 중국 산동 지역에서 장사성 등의 홍건적이 원 조정에 반기를 들자, 원은 고려에 토벌을 도울 조정군을 요구했다. 당시 서른아홉 살이던 최영은 대호군 대장군으로서 류탁·염제신 등과 함께 고려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원에 대기하고 있던 고려인 2만 명까지 합류시켜 지휘했다. 이 원정은 최영이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며 전쟁 경험을 축적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1355년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공민왕의 명을 받아 원에 빼앗겼던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작전에 나섰다. 더 나아가 서쪽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양에 이르는 옛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쌍성총관부 전투에서 최영을 도운 이들이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였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되찾았고, 이성계 부자는 이후 고려 말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이때 함께 싸웠던 최영과 이성계가 수십 년 뒤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적대하게 된다는 점은 고려 말 정치사의 극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홍건적과 왜구 사이에서 고려를 지키다
고려의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압박했고 남쪽 해안에서는 왜구가 창궐했다. 1358년 최영은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가 되어 오예포, 곧 장연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했다. 1361년에는 10여만 명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해 수도 개경을 점령했고, 공민왕은 복주, 오늘날의 안동으로 피란했다. 최영은 이듬해 전리총랑 하윤원과 총병관 정세운, 안우, 이방실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개경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수도를 잃었던 고려가 다시 정치적 중심지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군사적 역할이 두드러졌다.
원나라는 내부에서 홍건적의 도전과 황제 계승 분쟁을 겪으면서도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던 공민왕을 폐위하려 했다.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는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세우기 위해 1364년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침입했다. 최영은 이 공격도 막아냈다. 이어 1365년 왜구가 교동과 강화를 약탈하자 동서강도지휘사로서 방어와 경계에 나섰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11일 창릉에 들어온 왜구가 세조의 어진을 훔쳐 가는 사건이 발생했고, 지휘사는 김속명으로 교체되었다. 최영은 어진을 빼앗긴 책임을 빌미로 신돈에 의해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경력은 좌천으로 끝나지 않았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고 그 세력이 몰락하자 최영은 곧 소환되어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진압했다. 탐라 토벌군에서 최영은 문하찬성사로서 양광전라경상도통사를 맡았고, 염흥방은 도병마사로 참여했다. 양광도군은 이희필과 변안렬, 전라도군은 목인길과 임견미, 경상도군은 지윤과 나세가 각각 상원수와 부원수를 맡았으며, 김유는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도순문사를 맡았다. 이는 여러 지역의 군대를 조직해 바다 건너 제주 작전을 수행한 대규모 군사 행동이었다.
1376년 왜구가 삼남 지방을 휩쓸고 원수 박원계가 참패하자 최영은 다시 육군을 이끌었다. 왜구가 논산 연산의 개태사 방면으로 올라오자 홍산에서 크게 격파했고, 이 승리로 철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는 백발의 최영을 가리켜 ‘백수 최만호’라고 부르며 몹시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그는 1377년 서강에 침입한 왜군을 물리쳤고, 1378년에는 승천부, 곧 풍덕에 들어와 개경까지 위협한 왜구를 이성계·양백연 등과 함께 섬멸했다. 이 공으로 안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80년 왜구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는 계획이 나오자 해도도통사였던 그는 왜구를 이유로 천도할 수 없다며 반대해 계획을 철회시켰다.
권문세족을 숙청하고 문하시중에 오르다
우왕은 최영의 서녀인 영비 최씨를 자신의 비로 삼으려 했다. 최영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거절했으나 우왕이 끝까지 요구하자 마지못해 승낙했다. 이후 그는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1381년 영삼사사 등을 지낸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387년과 1388년에 벌어진 조반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섰다. 염흥방의 종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자 조반은 이광을 죽이고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1388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우왕에게 조반을 수배하도록 강요했다. 순군옥에서 심문받은 조반은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곳곳에 종을 풀어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을 해치고 있으므로 그들이야말로 큰 도적이며, 자신은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이광을 죽였다고 항변했다.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사건을 반역으로 만들려 했다. 젊은 시절 학문이 뛰어나 여러 차례 동지공거가 되고 개혁을 주장했던 염흥방은 이인임에게 맞서다 귀양을 다녀온 뒤 권문세도가와 가까워져 탐욕스러운 권력자로 변해 있었다.
우왕은 이들의 전횡을 더는 묵과할 수 없다며 최영과 이성계에게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지키게 했다. 이어 염흥방과 임견미, 도길부의 체포를 명했다. 인사 개편에서 최영은 문하시중, 이성계는 수문하시중, 이색은 판삼사사가 되었다. 우현보·윤진·안종원은 문하찬성사, 문달한·송광미·안소는 문하평리, 성석린은 정당문학, 왕흥은 지문하사, 인원보는 판밀직사사에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왜구와 야인에 맞서 승리하며 공로와 경륜을 쌓은 최영은 조반을 반역자로 몰려 했던 무고 사건을 계기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최고위 재상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최영의 최후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이 원래 원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므로 명이 다스려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명은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했다. 최영은 이에 반발해 4월 우왕과 함께 요동 공격을 주장했다. 이자송이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따지자 최영은 그를 임견미 일당으로 몰아 곤장 107대를 때리고 전라도 내상으로 유배하려 했으며, 얼마 뒤 죽였다. 요동정벌 계획이 확정되자 최영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이성계와 조민수를 부장으로 삼고 우왕과 함께 평양까지 나아갔다.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출병에 반대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고,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 없으며, 군사가 북쪽에 집중된 사이 왜구가 침입할 수 있고, 여름철의 잦은 비로 활의 아교가 녹는 데다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최영과 우왕은 요동정벌을 단행했다.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위화도에 도착하자 최영은 강을 건너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성계는 명령에 불복해 군대를 돌려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최영이 각별히 신임해 집안의 보검까지 주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도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설득을 받아 회군에 가담했다. 개경에 있던 정도전·조준·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과 반대 여론을 누그러뜨렸다. 크게 노한 최영은 회군 세력에 맞서 싸웠으나, 이성계 편으로 돌아선 장수들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그는 고봉, 오늘날의 고양으로 유배되었다가 개경으로 소환되어 죽임을 당했다. 향년 73세였다.
최영은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고 결백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무덤에는 실제로 풀이 자라지 않아 ‘붉은 무덤’이라는 뜻의 적분으로 불렸고, 최근에는 유가족이 풀을 심었다.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요동을 공격하려 한 죄로 참수하고 시신을 길에 버리게 했지만, 그의 당당한 최후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곳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후손들의 구전에 따르면 훗날 조선 초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손녀사위 맹사성이 밤에 시신을 운구해 고봉현 대자산의 부모 묘 아래에 있던 부인 묘에 합장했다.
전장의 충신에서 민간의 수호신으로
최영은 고려를 위협한 왜구와 홍건적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원의 간섭 아래 잃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았으며, 목호의 난을 진압한 장군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으로는 이인임과 거리를 두었고 1388년 염흥방·임견미 등 권문세족을 제거했다. 그러나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대립했고, 위화도 회군으로 패배하면서 생을 마쳤다. 자료에서는 여러 권력자가 횡행하던 시기에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우고 왕에게 충성한 고려의 충신으로 평가한다.
그에 대한 기억은 역사 기록을 넘어 민간신앙으로도 이어졌다. 무속에서 ‘최영 장군’은 수명과 장수, 안과태평을 관장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지며, 무속에서 가장 많이 모시는 신령 가운데 하나로 전한다. 제주도 추자도에는 제주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최영의 사당이 있다. 상추자도 추자초등학교 북서쪽 벼랑 위에 자리한 이 사당은 최영이 1374년 제주도의 몽고인 목장을 토벌하러 가면서 추자도에 머문 일과 관련된다. 그는 음력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토벌을 마친 뒤에는 음력 9월 23일부터 10월 10일까지 이곳에 체류했으며, 주민을 많이 도운 일을 기념해 사당이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영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까닭은 승전의 기록만이 아니라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태도에 있다. 열여섯 살에 받은 “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재물과 파벌을 멀리하면서 전쟁과 정치의 최전선에 섰다는 점이 그의 생애를 하나로 잇는다. 요동정벌의 판단과 강경한 처분은 역사적 검토의 대상이지만, 무너져 가던 고려에서 국토와 백성을 지키려 했던 장군의 공적과 결백을 중시한 삶은 그를 고려 말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오랫동안 존경받는 인물로 남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