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로 근대 공론장을 열다

서재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로 근대 공론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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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에서 한성으로, 개화의 문을 만난 소년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독립운동가·의사였으며, 미국에서는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자는 윤경, 호는 송재와 쌍경, 본관은 대구이며, 피제손이라는 이름과 오시아(N. H. Osia)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그는 전라도 동복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진사 서광효와 성주 이씨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가족이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로 옮겼고, 다시 금곡리 256번지로 이주하면서 논산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집안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후손이었지만, 6대조 서덕수가 세제 연잉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된 뒤 가세가 기울었다. 할아버지 서상기는 유복자로 가난하게 살았고, 아버지 서광효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서재필이 일곱 살이 되자 아들이 없던 서광효의 6촌 형제 서광하가 그를 양자로 맞았다. 어린 서재필은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왔다. 양어머니는 안동 김씨 세도가인 김온순의 딸이자 훗날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소년 서재필은 키가 크고 힘이 셌으며 자존심과 패기가 강한 아이로 전해진다. 외가가 있던 보성군 문덕면에서 부임하던 수령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고, 수령의 부채를 빌려 장단을 맞추며 민요를 불렀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이름을 묻는 말에는 자신을 서재필이라 밝히고, 아버지가 진사에 급제한 해에 자신이 태어나 두 가지 경사가 겹쳤다는 뜻에서 쌍경이라 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처음 쌍경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가 재필로 바꾸었고, 서재필은 훗날 쌍경을 첫 아호로 사용했다. 이 일화는 어린 시절부터 권위 앞에서 위축되지 않았던 그의 기질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과거 급제와 개화파의 막내

1872년 양부모는 한성에서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성근의 집에 서재필을 보내 과거를 준비하게 했다. 그는 김성근에게서 《동몽선습》과 《사기》, 사서육경을 배웠으며, 많은 내용을 암송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성근의 집에 드나들던 서광범과 김옥균을 이때 만났고, 김옥균을 통해 세 살 위인 박영효와도 교유했다. 이어 박규수·오경석·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과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같은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접했다. 노론 계열 가문에서 성장한 그가 북학파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 형성에 참여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서재필은 1878년 봄 초시에 합격했다. 1879년 초 진사시에서는 낙방했지만, 그해 고종이 직접 주관한 전강에서 1등을 차지해 곧바로 과거의 최종 시험에 나갈 수 있는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당시 시관이 사서삼경 가운데 임의의 대목을 지적하자 일곱 차례에 걸쳐 막힘없이 외웠다고 한다. 그는 1882년 3월, 열여덟 살의 나이로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급제 직후 승문원가주서와 군직을 거쳤고, 부사정이 되어 경연가주서를 겸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경서 인쇄와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들어간 뒤에는 김옥균·서광범·박영효·홍영식·윤치호·이상재·박정양·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했다. 김옥균은 열두 살 어린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여겼다. 개화파 인사들은 한성부 서대문의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했다. 일본어를 알고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던 승려 이동인이 역사·지리·물리·화학 서적과 사진, 성냥 등을 들여오자 서재필은 동료들과 이를 탐독했다. 이들은 자리를 옮겨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도 서양 문물에 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했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서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개화당으로 결속할 때 서재필은 가장 어린 구성원이었다.

일본 유학과 신식 군대의 꿈

1883년 서재필은 승정원 가주서와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부봉사가 되었다.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옥균의 권유를 받아, 그해 봄 열네 명의 평민 출신 청년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883년 5월 일본에 도착한 일행은 게이오 의숙에 입학했으며 서재필이 유학생 대표를 맡았다.

게이오 의숙에서 그는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관찰했다. 어학 능력이 뛰어나 몇 달 만에 통역이 거의 필요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일본에 머물던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영어도 배웠다. 정규 과정 밖에서는 조선인 동기생들에게 무예를 익혔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 고난도 품새를 배우고,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 조르기와 누리기 등 유술 전반을 배웠다. 1884년 1월 게이오 의숙 과정을 수료한 뒤에도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세심하게 살폈다.

1884년 1월부터는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과 제식훈련, 폭탄 투척을 비롯한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 흐트러지지 않고 솔선수범한 모습은 일본의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 크게 실렸다. 약 7개월의 훈련을 마친 그는 귀국한 사관생도들과 함께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 설치를 건의했다. 고종의 승낙으로 병조 아래 조련국이 만들어졌고, 서재필은 고종의 특명에 따라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에 부딪혀 폐지되었고, 청나라 장교가 군대 훈련을 맡게 되면서 서재필과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미국 시민이 된 망명객

신식 제도와 군사력을 통해 조선을 바꾸려 했던 서재필은 1884년 김옥균·홍영식·윤치호·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은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났다. 조선에서 정치적 변화를 추진하던 젊은 관료의 삶은 이 실패를 경계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조선의 문신이자 군사 개혁을 추진하던 관리에서 낯선 나라에 정착해야 하는 망명객이 되었다.

미국에서 그는 필립 제이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890년 6월 10일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미국에서 병리학자와 의사로 일했으며, 시인과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해 전통 관료 체계에 들어갔던 인물이 일본의 신식 교육과 군사훈련을 거쳐 미국 시민이자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간 이력은 그의 생애가 조선 후기의 변동과 세계의 새로운 제도를 동시에 통과했음을 보여준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은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했고, 서재필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갑신정변 실패 뒤 떠난 지 여러 해 만의 귀국이었다. 이때 조선은 오랫동안 이어진 기존 질서와 새로운 정치·사회 제도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서재필은 무력 정변이 아니라 신문 발간, 토론, 강연, 상소와 집회 같은 공개적인 방법을 통해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 원리와 문물을 알리는 활동에 나섰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열어 보인 공론장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이어 같은 해 7월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고 상소 활동을 벌였으며, 집회와 시위도 주도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했고, 새로운 문물을 직접 살펴보기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과거 일부 관료와 지식인의 비밀 모임에서 논의되던 개화의 문제를 신문과 공개 행사를 통해 더 넓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활동은 서재필의 언론인·정치인으로서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는 국민이 정치와 사회 문제를 접하고 토론하며 의사를 표현하는 활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추방했고,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했다. 대한제국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으며, 서재필은 그 출범 전후의 격동 속에서 언론과 결사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지원에 더욱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의사로도 일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했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독립운동이 일시적인 정치 참여에 머물지 않고 오랜 망명 생활과 경제적 곤란 속에서도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광복 뒤의 귀국과 오래 남은 이름

광복 직후 서재필은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을 받아 귀국했다. 그는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최고고문을 맡아 해방 이후의 정치 과정에 참여했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운동도 있었지만 본인이 이를 사양했다. 갑신정변의 청년 개화파로 출발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이끌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이 해방된 고국에서 다시 공적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1948년 미국으로 출국했다. 1951년 1월 5일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미국에서 병사했다. 그의 생애는 조선의 과거제와 관료 생활, 일본 유학과 신식 군사훈련, 갑신정변과 망명, 미국 시민권 취득, 대한제국기의 언론·정치 운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지원, 광복 이후의 고문 활동까지 이어졌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늘날 서재필이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전달할 구체적인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해 토론·강연·상소·집회·시위를 이끌었으며, 민주주의와 참정권,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소개했다. 정변의 실패와 추방, 망명과 경제적 곤란을 겪으면서도 의사로 일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의 삶은 한국 근대사의 격변 속에서 언론, 시민 참여, 교육과 독립의 가치를 행동으로 연결한 개화운동가의 궤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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