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0일 엑스(X)에 글을 올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재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미국 측에 계속 의견을 개진하고, ICC가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총리, X에 ICC 지지 입장 게시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법의 지배를 일관되게 중시하며 그 역할을 수행하는 ICC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조치는 이러한 일본의 일관된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적었다.
미국과의 소통 방침도 함께 내놓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 간에 긴밀히 소통하면서 미국 측에 지속해 의견을 개진하겠다”고 했다. 또 “아카네 소장 및 관계국과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ICC가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8월 미국은 일본인인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 등 ICC 관계자 개인을 제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당시 바로 반응하지 않았고, 발표 이튿날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서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이후 미국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자 일본 야당과 언론은 “미국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번 입장은 그때보다 빨리 나왔다.
일본 정부 부대변인인 오자키 마사나오 관방부장관은 9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측의 조치를 비판했다. 러시아 검찰총장실이 ICC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등에 아카네 소장 등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한 것을 두고 “ICC 관계자 개인에 대한 조치는 부당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 유감이다”라고 했다. 대응 방침에 대해서는 러시아에 대한 항의를 포함해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벨평화상 발표 직후 나온 미국의 제재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나비 필라이(85) 국제사법재판소(ICJ) 임시 재판관을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평화 증진과 국제법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필라이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와 ICC 재판관을 지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발표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ICC에 대한 고강도 제재를 내놓았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같은 날 영상메시지로 제재를 발표하며 “다수가 ICC의 일원이고 미군 병력에 방어를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동맹이 이 불량 재판소 제지에 나서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그들이 그러지 않으면 미국은 미국인이 더는 위협받지 않을 때까지 ICC를 산산조각내는 캠페인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특정 국가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미군에 방어를 의존하는 동맹’이라고 표현해, 대규모 미군 병력이 주둔하는 일본이 그 대상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입장은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의 협조를 기대한다고 밝힌 직후에 나왔다.
이번 제재로 동결되는 대상은 미국 관할 지역 안에 있는 ICC 자산 전부다. 미국 기업·개인에게는 ICC와의 거래를 끊는 데 6개월의 기한이 주어졌다. ICC는 전쟁범죄·대량학살 등 반인도주의 범죄를 저지른 인사를 처벌하기 위해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설립된 상설 국제재판소로, 한국도 로마규정 당사국이다. 미국이 ICC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ICC가 미군을 전쟁범죄로 처벌하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 직후 제재가 나오면서 의도적인 제재가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ICC·유럽·노벨위원회의 반응
아카네 소장은 “법원이 사법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번 제재는 국제 형사 재판소를 설립한 주권 국가들에 대한 공격입니다”라고 반발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ICC 지지를 밝히고 제재가 발효되기 전까지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롭 예턴 네덜란드 총리는 “오늘 희망적인 점은 이런 제재가 즉시 발효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6개월 동안 미국·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할 시간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외무장관은 EU 집행위원회에 ‘차단 규정’을 발동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3국이 부과한 제재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다.
요르겐 와트네 프리드네스 노벨위원장은 수상자 발표 뒤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아카네 소장 등이 받고 있는 미국 정부의 제재를 거론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상자 선정은 제재를 중단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평화상은 국제법이 제 기능을 하도록 분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판사들을 위한 상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필라이 본인은 수상 발표 하루 전인 8일 독일 남부 뉘른베르크에서 인터뷰를 갖고 국제 형사 사법이 받는 정치적 압력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나는 큰 진전을 목격해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방국과 관련된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판사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은 사법 독립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