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1월 5일 가상자산 소득 과세를 2029년 1월로 2년 유예하고 손실 이월공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가상자산 과세 네 번째 유예 추진
이형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국회와 과세 유예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시행 예정일은 2027년 1월 1일이었으나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다시 유예를 추진하기로 했다.
가상자산 과세 방침은 2020년 12월 소득세법 개정으로 공식화됐다. 최초 시행 예정 시점은 2022년이었지만 2023년으로 한 차례 미뤄졌고, 이후 2025년과 2027년으로 연기됐다. 이번 유예가 확정되면 2020년 도입 결정 이후 네 번째 연기가 된다.
기존에는 준비 부족과 투자자 보호 필요성, 형평성, 제도 정비 및 과세 인프라 미비 등이 유예 사유로 제시됐다. 정부는 이번에는 미국과의 가상자산 정보 교환이 2029년부터 이뤄질 전망이라는 점을 배경으로 들었다.
정부는 내년에 과세를 시작하면 해외에 비해 국내 시장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전문가·업계·국회 등의 의견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해외 거래소 이용자의 소득을 파악하기 어려워 국내 거래소 이용자에게 세 부담이 집중될 수 있다는 형평성 문제도 제기됐다.
연내 제정을 추진하는 디지털자산법도 유예 배경에 포함됐다. 이 법은 가상자산의 발행·유통·공시·상장 등 전체 생태계를 포괄하는 종합 법안이다. 법 제정 과정에서 디지털자산의 법적 정의와 사업자 규율 체계 등 제도적 기반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 부총리는 “과세 시행이 세 차례 미뤄진 데 이어 한 번 더 과세 유예를 말씀드리게 된 점을 무겁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행 시기를 조정하더라도 ‘소득 있는 곳에 과세’라는 조세의 기본원칙은 견지되어야 한다. 정부는 향후 2년의 준비기간을 활용해 가상자산 과세가 2029년에는 차질 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연 250만원 공제 후 20% 과세
현행 소득세법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의 양도·대여로 발생한 소득을 기타소득으로 분류한다. 연간 가상자산 양도·대여 소득에서 기본공제 250만원을 뺀 금액에 20%의 세율을 적용하도록 했다. 지방소득세를 포함한 세율은 22%다.
정부는 가상자산의 가격 변동성이 큰 점을 고려해 손실을 3년간 이월공제하는 방안도 국회와 협의한다. 현행 제도는 손익을 1년 단위로 계산해 이전 연도의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월공제가 도입되면 3년 동안 발생한 손해와 이익을 통산해 과세한다.
예를 들어 2029년에 1000만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이듬해 2000만원의 이익을 얻으면 기본공제 250만원과 이월 손실을 차감한 750만원에 세율을 적용한다. 현행 제도에서는 첫해 1000만원 손실 뒤 이듬해 1000만원 이익을 내면 합산 수익이 0원이어도 165만원의 세금이 발생한다. 이월공제를 적용하면 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국은 손실 이월공제를 인정하고 있다. 이 부총리는 “손실 이월공제가 가상자산 과세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게 이번 정기국회에서 유예 조치와 함께 처리되도록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과세 인프라와 세부 기준 정비
정부는 유예기간에 시장 상황과 거래 방식, 이용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과 시장 변화를 고려해 과세제도를 정비한다. 국제 정보교환체계 구축 동향을 파악하고 국내외 과세자료를 연계·분석해 해외 거래 과세 인프라도 확충할 계획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암호화 자산 자동정보교환체계인 CARF는 내년 시행된다. 미국은 2029년부터 CARF에 참여할 예정이며, 미국과의 정보 교환도 2029년부터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는 이에 따른 과세 자료 확보 여건을 면밀하게 점검할 방침이다.
전문가와 업계,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디지털자산 과세 민관합동 워킹그룹’도 운영한다. 워킹그룹은 과세제도 합리화와 세부 과세 기준, 납세자의 신고 편의 제고 방안을 논의한다.
정부는 내년 상반기까지 제도 개선안을 마련하고 관련 법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은 2027년 정기국회에 제출하며, 2028년 상반기에는 세부 과세 기준을 업계와 납세자에게 안내한다.
정책 신뢰성과 조세 형평 논란
과세 시행 직전 네 번째 유예를 추진하면서 정책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둘러싼 논란도 예상된다. 조세 형평에 어긋나는 무책임한 결정이며 국내외 시장 상황을 이유로 다른 소득과의 형평성을 무시한 특혜성 유예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국가 간 과세 정보 교환이 미비한 상황에서도 미국·일본·영국·독일 등은 수년 전부터 가상자산에 과세해 왔다는 점도 반대 근거로 제시됐다. 주식 과세와 가상자산 과세의 형평성도 쟁점이다. 2023년 시행 예정이던 금융투자소득세는 한 차례 유예된 뒤 2024년 12월 폐지됐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자본이득 과세의 기본 틀인 금투세 대체 입법을 먼저 마련해 구체적인 추진 일정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가상자산 과세 체계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전날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부에 과세 유예를 공식 요청했다. 지난달 27일 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는 청년층의 반발 가능성 등이 유예 근거로 제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