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헤이그 특사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다

이상설, 헤이그 특사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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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관직에서 길을 찾은 보재 이상설

이상설(李相卨)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였다. 생부는 이행우였으며, 1876년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생모는 벽진 이씨이고, 아내는 참판 서공순의 장녀인 달성 서씨였다. 그는 조선(1392~1897) 말기에 관직에 진출해 대한제국(1897~1910)의 의정부 참찬 등을 지낸 문신이었고, 국권을 잃어가던 시기에는 해외로 활동 무대를 넓힌 독립운동가였다.

1894년 이상설은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했다. 전시는 국왕 앞에서 치르는 과거의 마지막 시험으로, 그의 관직 생활은 조선의 전통적인 관리 선발 절차를 통과하면서 시작되었다. 1896년에는 성균관 교수가 되었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으며 신학문을 접했다. 전통 학문을 바탕으로 관료가 된 이상설이 새로운 지식과 외국의 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후 그의 교육·법률 연구와 국제 외교 활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실제 저술로 이어졌다. 1900년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우에노 기요시의 《근세산술》을 번역하고 편집해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편찬했다. 또한 외국 서적을 참고하면서 만국공법을 비롯한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수학 지식을 소개한 《산술신서》와 국제 법질서에 관한 연구는 이상설이 전통적인 문신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지식을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훗날 그가 대한제국의 권리와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한 배경에도 이러한 신학문과 국제법 연구 경험이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침략에 맞선 관료의 상소와 결단

1904년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상설은 박승봉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두 사람은 일본의 요구가 지닌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개간권을 내주는 데 반대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외세의 요구를 단순한 경제 사업으로 보지 않고 국권을 침해할 수 있는 문제로 판단했으며, 상소와 단체 활동을 통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1905년에는 법부 협판과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그러나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그의 관직 생활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이상설은 조약 체결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약에 관여한 오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고종에게 다섯 차례 올렸다. 관료로서 황제에게 거듭 자신의 뜻을 전달했지만,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국권 회복과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을사늑약에 대한 이상설의 대응은 상소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다섯 차례의 상소, 관직 퇴진, 자결 기도는 그가 조약 체결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국가의 존립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음을 드러낸다. 관직을 떠난 뒤에는 활동의 방식도 달라졌다. 대한제국의 제도 안에서 황제에게 간언하던 문신은 교육기관을 세우고,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하며, 국제회의에서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독립운동가로 나아갔다.

서전서숙과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이상설은 1906년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조국을 떠났다.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인 연추로 이동한 그는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을 논의한 뒤 간도 용정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여준·왕창동·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에서는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에 힘썼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다음 해 문을 닫아야 했다. 교육을 통해 사람을 길러내려던 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나, 해외에서 국권 회복의 기반을 만들려는 그의 방향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방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한흥동을 건설했다. 한흥동은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서술된다. 이상설의 활동은 학교 설립을 넘어 한인들이 정착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갈 공간을 마련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국내에서 정상적인 정치 활동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국경 밖의 한인 공동체를 교육과 조직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1910년에는 국내외 의병을 통합해 더욱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유인석·이범윤·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으며, 퇴위한 고종에게 그 편성 사실을 상주했다. 이어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고종이 러시아로 망명할 것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이는 흩어진 의병을 하나의 군사 조직으로 묶는 한편, 퇴위한 황제를 중심으로 해외에 정치적 구심점을 세우려 한 구상이었다.

같은 해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이상설은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합병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성명회는 미국·러시아 제국·청나라 등에 선언서를 보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일본의 교섭에 따라 러시아 제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 그는 다음 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헤이그에서 세계에 호소한 대한제국 특사

1907년 러시아 제국 군주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이상설을 정사로 삼아 밀사로 파견했다. 이상설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대한제국 황제의 명을 받은 사절단이 국제회의의 공식 석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상설은 물러서지 않았다. 1907년 7월 5일 만국평화회의장에 나가 막힘없는 프랑스어로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는 대한제국 황제의 뜻을 받들어 총통과 각국 대표에게 눈물로 고한다고 밝힌 뒤, 한국이 1884년에 자주독립국이 된 사실이 공인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국과 외교관계를 계속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압박해 다른 나라들과 국제 교섭을 할 권리를 강탈했다고 고발했다.

호소문은 일본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모든 정무를 마음대로 시행한다는 점, 육군과 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한다는 점,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상설은 총통에게 정의에 근거해 이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한국이 자주국인데도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관여하고, 황제의 명을 받은 사절단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대한제국 사절단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며, 모든 호소를 허용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비록 회의 참석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이 호소는 대한제국이 자주국이며 일본이 무력으로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주장을 국제사회 앞에 제기한 행동이었다. 헤이그 특사단에서 정사를 맡은 이상설은 학문으로 연구해 온 국제 질서의 원리를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적 논리로 펼쳐 보였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이어진 망명 투쟁

헤이그 특사 활동이 실패한 뒤 일본은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1908년 이후 사실상 대한제국 관직에서 은퇴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한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계속 호소했으며, 여러 지역의 미주 한인 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썼다.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에는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에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1911년 권업회 창설에 참여했다. 권업회를 조직해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했으며, 한인 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언론·교육·경제 기반을 함께 다지려 한 권업회 활동은 해외 한인 공동체를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주체로 결속시키려는 사업이었다.

1914년에는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의 한인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수립이 추진된 이 조직은 한일합병 이후이자 3·1운동 이전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로 제시된다. 그러나 수립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일본과 러시아 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면서 한인들의 정치·사회 활동을 철저히 금지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으며 권업회도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됐다. 이상설은 다시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선임되어 투쟁을 이어갔다.

돌아오지 못한 삶과 오늘날의 기억

이상설은 1917년 4월 1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동지들에게 합세해 조국 광복을 반드시 이룩하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광복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므로 혼백조차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우고 재를 바닥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1971년 숭모비를 세웠고, 1975년에는 숭렬사를 건립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2005년 12월 그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청북도에는 그의 출생지와 관련된 진천 이상설 생가가 기념물 제77호로 전해진다.

이상설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자 성균관 교수였고, 《산술신서》를 편찬하며 신학문과 국제법을 탐구한 학자였다. 동시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을사늑약에 맞서 상소를 올린 관료였으며, 서전서숙·한흥동·13도의군·성명회·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신한혁명당으로 이어지는 해외 국권회복운동의 조직자였다. 무엇보다 헤이그에서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밝히고 일본의 압박을 세계에 호소한 정사로 기억된다. 귀국하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생을 마쳤지만, 교육과 외교, 언론과 공동체 조직, 군사적 통합과 망명정부 수립을 거듭 시도한 그의 삶은 국권 회복을 위해 가능한 길을 끝까지 찾았던 인물의 기록으로 오늘날에도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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