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위정척사운동과 항일 의병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유학자

최익현, 위정척사운동과 항일 의병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유학자

기사 이해를 돕기위한 이미지

:::writing{title=”최익현, 위정척사와 항일 의병의 길을 걸은 조선 말 유학자” id=”58391″}

조선 말 격변기에 태어난 유학자, 최익현의 시작

최익현(崔益鉉, 1834년 1월 14일~1907년 1월 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며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조선(1392~1897)이 서서히 근대 국제 질서와 마주하고 대한제국(1897~1910)이 세워지던 격변의 시기에 그는 성리학적 가치와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입장에서 활동했다.

본관은 경주이며 초명은 최기남(崔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4세 때 단양으로 옮기는 등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지만, 학문에 대한 뜻을 잃지 않았다.

14세가 되던 해 그는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이항로에게서 격몽요결, 대학장구, 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익혔으며, 스승이 강조한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태도를 배웠다. 이후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인정받았고, 화서학파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는 인물이 되었다.

관료로서의 강직한 정치 활동과 흥선대원군 비판

최익현은 1855년(철종 6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순강원수봉관,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이조정랑, 신창현감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는 지방관과 언관으로 활동하면서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강직한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된다.

그의 정치적 출발점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대한 반대였다.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이후 흥선대원군이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과 북인 등 다른 세력을 등용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익현은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1868년 그는 경복궁 중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규모 공사에 많은 비용과 인력이 들어가 백성의 부담이 커지고,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 상승과 재정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정치적 실정으로 보고 시정을 요구했다. 같은 해 다시 경복궁 중건을 무리한 토목공사라고 비판하며 중지를 요청했다.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그는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가 존주대의를 훼손하고 학문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폐령 취소를 건의했다. 이처럼 그는 개혁 자체보다 유교적 질서와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 운영 원칙을 기준으로 정책을 판단했다.

강화도 조약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의 중심

최익현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반대 운동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통상 관계를 논의하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외국과의 개항이 국가의 자주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이다. 그는 개항을 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담은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를 제시하며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이 상소는 당시 여러 개항 반대 상소 가운데 가장 잘 지어진 글로 평가되며,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조선 후기 일부 유학자들이 서양 문물과 외세의 접근에 대응하며 내세운 사상이다. 최익현은 이항로에게 배운 위정척사의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의 독립성과 전통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그는 일본과의 통상 확대에 반대하다 흑산도에 4년간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이후에도 외세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위정척사론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개화 반대에서 항일 의병장으로 이어진 길

최익현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에도 반발했다. 그는 외세의 내정 간섭을 비판했고, 갑오개혁 이후 추진된 변화가 국가의 전통 질서를 훼손한다고 보았다. 이어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발생하자 의병 활동과 연결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는 유림 거두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신체와 머리카락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단발령을 비판했다. 단발령 반대 여론을 주도한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당시 최익현은 조정이 의병을 해산시키기 위해 자신을 선유위원으로 임명했을 때도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의병들을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고 보고, 이들의 거병을 단순히 탄압할 대상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국가 위기 상황에서 행동하는 인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을사늑약 저항과 마지막 의병 활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공개적으로 의병 모집에 나섰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최익현은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그러나 곧 관군에게 패배했고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 그는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항의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이후 대마도주의 사과와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했지만, 3개월 뒤 풍증과 단식 후유증으로 74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최익현은 생전에 개화파를 반대했지만, 동시에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와 일부 정책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고종의 황제 칭호 격상도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의 정치적 판단은 당시 유교적 가치관과 국가 운영 원칙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오늘날 기억되는 최익현의 역사적 의미

최익현은 조선 말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시대 변화 속에서 위정척사운동과 항일 의병 활동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리학자 출신 관료로서 상소와 정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외세의 압력이 커지자 의병장으로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의 삶은 조선 후기 유학자가 국가 위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개항과 개혁에 대해 시대적 한계를 가진 판단을 보이기도 했지만, 국가의 자주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인물로 기억된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오늘날 최익현이 기억되는 이유는 단순히 한 시대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조선 말기의 혼란 속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행동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기에 나타난 다양한 선택과 갈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