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을사늑약에 맞서 국권 회복을 호소하다

민영환, 을사늑약에 맞서 국권 회복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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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신의 가문에서 성장한 젊은 관료

민영환(閔泳煥)은 조선 말기인 1861년 8월 7일, 음력으로는 7월 2일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조선(1392~1897)의 대신이자 왕실과 혼인 관계로 연결된 척신이었으며,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과 사애(思厓)였다. 그는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었지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고모였으므로 고종과도 가까운 친족 관계였다. 흔히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3촌에 해당하는 먼 친척이었다.

1878년 민영환은 문과 병과에 급제하며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세도를 누리던 민씨 척족의 총아였던 그는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빠르게 승진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때 친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면서 그의 관직 생활은 중단되었다. 민영환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다.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자 유력 가문의 젊은 관료로 출발했지만, 정치적 격변이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사직한 지 4년 뒤인 1886년, 민영환은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도승지, 관리 인사를 맡은 이조의 참판, 국가 의례와 교육을 관장하는 예조의 판서, 사법 업무를 맡은 형조의 판서,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한성부윤, 내무 행정을 관할하는 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특정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인사·의례·사법·수도 행정과 내무에 걸친 핵심 관직을 두루 경험했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그가 대한제국의 제도와 군사 체제를 개혁하려 할 때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을미사변과 세계를 향한 첫 여정

1895년 8월 민영환은 미국에 파견될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부임하지 못한 채 사직했다. 뒤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을 보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낙향해 바깥출입을 삼갔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의 정국을 크게 흔들던 시기에, 민영환 역시 외교관 임명과 사직, 정계 이탈을 거듭해야 했다.

이듬해인 1896년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는 러시아로 향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영국 등을 거쳤으며, 이 여행을 통해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직접 접했다. 왕실과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의 관료였던 그에게 여러 나라의 정치와 사회, 제도를 살펴보는 해외 경험은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다. 민영환의 외유는 단순한 의전 참석을 넘어, 이후 그가 개화와 제도 개혁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한 민영환은 의정부찬정과 군부 대신을 지냈다. 1897년, 광무 원년에는 다시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럽 6개국을 방문했다. 그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1897~1910) 초기에 두 차례에 걸쳐 넓은 지역을 여행한 외교 관료였다. 일본과 미국, 영국을 거쳐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경험에 더해 유럽 6개국을 살펴본 일은 당시 조선 관료 가운데서도 일찍 서양 문물을 접한 사례에 속했다.

개화와 민권 신장을 향한 개혁 구상

잦은 해외여행을 통해 서양 제도에 눈을 뜬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제 정치에 반영하려 했다. 그는 유럽 열강의 제도를 본떠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이는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운영 방식과 백성의 권리까지 변화시키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민영환의 주장은 서로 맞지 않았다. 그의 개혁안 가운데 채택된 것은 군사 제도 개편에 관한 부분이었고, 고종은 원수부를 설치해 육군을 통할하도록 했다.

민영환은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수구 세력이던 민씨 일파의 반감과 미움을 샀고 그는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빠르게 성장한 인물이 같은 민씨 세력의 반대 때문에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위치가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문의 기득권에만 머물기보다 자신이 해외에서 확인한 제도를 바탕으로 국가의 변화를 추진하려 했다.

파직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한 민영환은 참정대신을 비롯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고, 훈1등과 태극장을 받았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로 활동한 데 이어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등도 역임하며 대한제국의 주요 관료직을 겸임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 세운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제국 선포 후 태극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관료 경력의 폭과 지위만 보면 그는 국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개혁 방향과 외세 대응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파직과 복귀를 반복했다.

을사늑약에 맞선 상소와 마지막 결단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 및 관료들과 여러 차례 대립했고,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현실을 성토했다. 그 결과 주요 요직에서 밀려났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를 크게 개탄했다. 조병세와 함께 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지만, 일제 헌병의 강제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가의 고위 대신이 공식적인 상소를 거듭했음에도 이를 관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정치적 한계를 드러낸다.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국민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는 유서의 제목을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고 적었다. 유서에서 그는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극에 이르러 인민이 생존 경쟁 속에서 진멸될 처지에 놓였다고 탄식했다. 이어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는다는 말로 동포들의 각오를 촉구했다. 자신의 죽음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동포를 돕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동포들에게 더욱 기운을 내어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치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자신도 죽음의 늪에서 기뻐 웃을 것이라고 썼으며, 마지막에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글에서 민영환은 개인의 절망을 토로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학문, 단결, 협력, 자유와 독립의 회복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과제로 남겼다.

외교적 노력과 순국 이후의 기억

순국 전 민영환은 미국을 통한 외교적 노력에도 관여했다.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했다.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한 뒤 민영환의 소개장을 가지고 아칸소주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과거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근무하면서 민영환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승만이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와 면담하도록 주선했고, 이승만은 국무성에서 30분 동안 헤이를 만나 호의적인 답변을 얻었으나 헤이는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딘스모어를 거쳐 외교 문서 우편으로 주조선 미국 공사에게 보내 전달했다. 그는 주미 조선 공사관 직원들과 장시간 면담한 뒤 신태무 대신 김윤정 참사관을 공사로 임명하자고 민영환에게 건의했고, 얼마 후 신 공사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05년 8월 10일 민영환은 결과와 관계없이 애국심을 가지고 노력한 이승만과 윤병구를 치하하며 300달러를 보냈다. 이는 그가 상소와 국내 정치뿐 아니라 해외 인맥과 외교 통로를 이용해 국권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행적이다.

민영환은 사망 후 의정대신으로 추증되었고, 고종 황제가 사망한 뒤에는 고종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는 그의 시호를 따서 충정로라는 동명을 제정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에 있는 민영환선생묘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으며, 묘는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에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그가 자결 당시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표석도 설치되었다.

‘충정공’이라는 이름이 남긴 역사적 의미

민영환의 백부 민승호도 같은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고 하면 민승호보다 민영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승만은 1955년 11월 30일 열린 민영환 50주기 추념식에서 그를 조선 말기의 욕스러운 역사에 빛나는 한 점을 남긴 인물로 기렸다. 고려 말 정몽주가 왕조의 마지막을 충절로 빛냈듯이, 조선 말에는 민영환이 있었다는 평가였다. 이승만은 민영환이 부국강병과 유신을 위해 노력했으나 개혁이 실패하고 국권이 쇠퇴하자 스스로 목숨을 바쳐 한국의 정신을 일깨웠다고 보았다.

민영환이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SBS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저서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이 대나무는 ‘혈죽’이라 불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조사했으며, 이후 민영환의 후손들이 이를 보관해 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죽음이 당대 사람들에게 단순한 대신 한 사람의 사망이 아니라 국권 상실에 대한 항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전승이다.

민영환은 왕실과 가까운 척신 가문에서 출발해 최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해외에서 접한 제도를 바탕으로 정치 개혁과 민권 신장을 주장하고 독립협회를 후원했다. 친일 관료 및 일본의 내정 간섭에 맞섰으며, 을사늑약 반대 상소가 강제로 저지되자 마지막 유서로 동포의 학문과 단결, 자유와 독립의 회복을 당부했다. 오늘날 그가 기억되는 까닭은 죽음 자체만이 아니라, 국가의 쇠퇴를 목격한 고위 관료가 개혁과 외교, 상소를 통해 끝까지 대응한 뒤 자신의 최후까지 국민을 깨우는 호소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대한제국이 국권의 위기에 놓였던 순간에 책임과 충절이 어떤 선택으로 표현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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