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에서 멀고도 가까웠던 연잉군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1694년 10월 31일인 음력 9월 13일에 태어나 1776년 4월 22일인 음력 3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은 이, 휘는 금, 자는 광숙, 호는 양성헌이다. 숙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숙빈 최씨였다. 1694년 숙종 20년, 창덕궁 보경당에서 숙종과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한동안 사저에서 지내다가 궁궐에 들어왔다. 1699년 숙종 25년 12월 24일에는 연잉군에 책봉되었다. 1704년에는 사릉 참봉 서종제의 딸인 달성군부인 서씨, 훗날의 정성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1719년에는 소실 정빈 이씨에게서 첫아들 경의군 행을 얻었다. 훗날 효장세자가 된 이 아이는 영조의 첫아들이자 숙종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난 첫 손자이기도 했다.
연잉군의 삶은 일찍부터 왕위 계승 문제와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에 놓였다. 당시 왕세자였던 경종은 어머니 희빈 장씨가 노론 세력에 의해 사사된 뒤 노론의 압박 속에서 불안정한 지위를 유지했고, 후사도 두지 못했다. 숙종은 말년에 노론의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사관을 물린 채 단둘이 만나는 독대를 하고 세자의 후사 문제를 언급했다. ‘정유독대’로 불리는 이 만남은 사관이 입시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왕과 대신이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 없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을 불렀다. 사관과 유생들은 물론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도 숙종과 이이명의 처사를 비판했다. 숙종 말년 정국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갈라졌고,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과 연잉군은 큰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노론은 후사가 없는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라고 요청했고, 경종은 1721년 음력 8월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가 되게 했다. 노론이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건의하자 소론은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반발했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을 계기로 정국이 뒤집히면서 노론은 불충과 반역 세력으로 몰렸다. 연잉군을 지지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과 50여 명의 고관이 사형당했고, 그 일족도 유배되거나 투옥되었다. 연잉군은 거대한 지지 기반을 잃었으며, 1722년에는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과 문유도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소론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선의왕후가 다른 종친의 아들을 양자로 삼으려 한 상황에서도 노론과 완론파 소론은 연잉군을 지지했다. 그는 경종의 비호 아래 불안정하게나마 왕세제 자리를 지켰다.
정통성 논란을 안고 오른 왕좌
1724년 8월 25일, 경종은 갑자기 병을 앓으며 복통과 설사를 반복하다가 승하했다. 승하 전에 게장과 꿀, 감, 인삼차 등을 수라로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영조 즉위 초기부터 경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독살설이 퍼졌다. 이 주장은 뒤에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에서도 거론되며 영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약점으로 남았다. 영조는 1724년 음력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이후 1776년 음력 3월 5일까지 51년 7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조선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긴 재위 기간이었으며, 81세 5개월을 살아 가장 장수한 국왕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영조는 신임사화 때 노론 숙청에 앞장선 소론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했다. 즉위 직후에는 자신이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뿐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노론 인사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악성 소문까지 조직적으로 유포되었다. 왕자 시절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경험한 영조는 처음에는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 중심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노론이 정국을 독점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소론 인사 일부를 다시 등용했다. 어느 한 붕당의 완전한 승리가 또 다른 보복과 숙청으로 이어지는 정치 구조를 완화하려 한 것이다.
영조는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고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중재하는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처벌하라는 노론 강경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727년 정미환국을 통해 노론 강경파를 정계에서 추방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해 당쟁이 더욱 격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의 탕평은 당론을 완전히 없애기보다 국왕이 인사권과 조정력을 행사하며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함께 관료 체계 안에 두려는 완론탕평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누적된 붕당 간 불신과 정통성 논란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론은 성공하지 못한 정책으로도 평가된다.
이인좌의 난과 흔들리는 탕평 정치
1728년에는 영조의 왕권을 직접 겨냥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은 이인좌와 이유익 등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이들은 소론 강경파인 준소파와 1701년 이후 실각한 남인 강경파를 포섭했다. 근기 지방의 남인이 호응했고,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무장 반란을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면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을 시중에 퍼뜨렸다. 청주에서 시작된 반란은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할 정도로 위세가 컸지만 결국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는 경상도 안동·예천·영천의 유생들과 대구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해 관군을 도왔다. 그러나 영조는 반란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크게 발호했다는 이유로 난이 끝난 뒤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했다. 해당 지역의 과거 응시를 정지하고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령을 내렸으며,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웠다. 영남 남인 일부가 반란에 호응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동·예천·대구의 유생들은 이인좌 측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충청도 출신인 이인좌를 ‘영남 도적’으로 부르는 것이 원통하다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남인도 상당수 가담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관직 진출을 금지당한 영남 남인계 유생들은 훗날 정조 때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담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 올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영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 데 노론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신임옥사 관련자와 노론 4대신을 사면·복권하고 그 후손과 관계자들을 등용했다. 반면 1748년에는 이인좌의 난에 연좌된 소론·남인 강경파가 다시 괘서를 붙였고, 과거 시험장에서는 영조를 가짜 군주라고 조롱하는 답안지까지 발견되었다. 영조는 1748년과 1755년 소론 강경파를 대대적으로 처벌하거나 유배했다. 노론을 중용하면서도 소론 관료를 등용하고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했으며, 노론 내부에서는 외척과 즉위 공로자들에게 거리를 둔 청명당파를 활용했다. 청명당은 소론과 남인의 배척을 주장하는 동시에 외척과 노론 강경파, 탕평에 적극 참여한 노론 탕평파까지 원칙에 어긋난다고 공격했다. 영조는 탕평책에 비판적인 이들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원칙론을 높이 평가해 중용했다.
균역법에서 서적 간행까지, 긴 재위의 개혁
영조의 대표적 민생 정책은 균역법이었다. 당시 민중은 국방 의무를 대신해 포목을 세금으로 냈는데, 영조는 그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이는 세제를 합리화하고 민중의 부담을 크게 낮추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한 조치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인 기민의 실태를 조사해 구제했고, 농업을 장려해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금주령을 내려 사치와 낭비의 폐습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자신도 적게 먹고 물자를 절약하는 검소한 생활로 지도자의 모범을 보이려 했다.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에 식량을 대신할 수 있는 작물이 되었다.
형벌과 호소 제도에서도 변화를 추진했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거나 개정해 민중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했고, 신문고를 부활시켜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릴 수 있게 했다. 국방 면에서는 북관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했다.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총 제작을 명했으며, 진을 설치하고 각 보진의 토성을 고쳤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해 조세 수입을 늘렸고, 1756년에는 60세 또는 70세 이상 노인만 응시하는 과거인 기로과를 신설했다. 백성의 부담을 낮춘 균역법과 함께 재정·군사·행정 체계를 보완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정책은 생활 안정과 국가 운영을 동시에 겨냥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학문을 좋아한 영조는 직접 글을 쓰고 인쇄술을 개량해 많은 책을 간행·반포했다. 편찬된 서적으로는 《퇴도언행록》, 《어제여사서》, 《육전》, 《소학훈의》,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속병장도설》, 《누주통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숙묘보감》 등이 있다. 《어제경세문답》과 《위장필람》, 《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가 직접 썼다. 1747년에는 세종의 《동국정운》 이후 300년 만에 중국 한자음과 조선 한자음을 함께 적은 최초의 국내 운서 《화동정음통석운고》를 간행했고, 1751년에는 18세기 현실 한자음을 대표하는 운서로 꼽히는 《삼운성휘》를 펴냈다.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고 실학의 학통이 자리 잡도록 했으며 풍속과 도의의 교정에도 힘썼다.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 아래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성장했고, 뒤를 이은 정조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성장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과 영조의 역사적 얼굴
영조의 긴 통치는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의 갈등으로 깊은 그늘을 남겼다. 1750년 혜경궁 홍씨가 경복궁에서 의소세손 이정을 낳자 영조는 큰 기대를 걸고 원손에 이어 세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의소세손은 1752년 4월 통명전에서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앞서 1751년 11월에는 장자 효장세자의 사후 홀로 지내던 효순현빈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일찍 과부가 된 맏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겼으며,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으로 한동안 상심했다. 1752년에는 훗날 정조가 되는 손자 이산이 태어났고, 같은 해 병석에 누운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시험 삼아 대리청정을 맡겼다.
사도세자는 노론의 의견만 따르지 않고 소론 인사도 일부 등용했다. 노론이 이인좌의 난과 관련해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을 처벌하고 관작을 추탈하라고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노론은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가졌다고 영조에게 보고했다. 선의왕후의 거처에서 성장한 세자가 소론에 호의를 보이자 노론은 더욱 경계했고, 외척들도 세자의 실수와 행동을 영조에게 전했다. 세자는 의대병과 정신질환을 앓았고 옷을 입는 문제로 궁녀들을 죽였으며 귀인 박씨 빙애를 살해하기도 했다. 계비 정순왕후와 그 친정 역시 세자와 갈등했다. 1762년에는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평안도 행차를 했고, 그 과정에서 소론 재상 조재호를 만났다. 같은 해 나경언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로 열거하자 영조는 크게 분노했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부자의 갈등은 결국 임오화변과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영조는 탕평을 내세워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고, 균역법으로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악형 폐지와 신문고 부활, 기민 구제, 농업 장려, 국방 정비, 서적 편찬과 인쇄술 개량을 추진한 군주로 기억된다. 동시에 그의 탕평론은 끝내 붕당 갈등을 해소하지 못했고, 정통성에 대한 불안과 정치 세력의 보고 속에서 사도세자와 파국에 이르렀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오늘날 영조가 계속 기억되는 이유는 51년 7개월이라는 조선 최장기 재위 동안 백성의 세금과 형벌, 학문과 국방에 이르는 폭넓은 제도를 바꾸면서도 왕권·붕당·가족의 비극이 얽힌 복합적인 통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위대한 개혁의 성과와 통치자의 한계가 한 인물 안에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