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건천동에서 자란 무인의 꿈
이순신(李舜臣)은 조선 중기인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에 한성부 남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 근처에 해당하는 곳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며,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요·순·우 임금의 이름자를 차례로 붙여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이라 지었다. 이순신의 외가는 초계 변씨였고, 훗날 혼인한 처가는 온양 방씨로 당시에는 상주 방씨라고도 했다.
그는 고려 때 정5품 신호위 중랑장을 지낸 덕수 이씨 시조 이돈수의 12세손이며, 조선 초 예문관 대제학과 영중추부사 등을 지낸 이변의 후손이었다. 증조부 이거는 정언과 이조좌랑, 사헌부장령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고, 춘추관편수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조부 이백록은 152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오랫동안 성균관 생원으로 지냈고, 이후 선교랑 평시서 봉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정도 음서로 관직에 올라 1573년 병절교위, 1576년 종5품 창신교위를 지냈다. 이처럼 이순신은 문반 전통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진로로 무관의 길을 선택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건천동에서 보냈다. 같은 동리에 살았던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일찍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자질을 보였다고 기록했다. 아이들과 놀 때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했고, 뜻에 맞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눈을 겨누려 해 어른들까지 꺼렸다고 한다. 류성룡은 그의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성장하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했고 글씨도 잘 썼다. 1565년 방씨와 혼인한 뒤에는 처가가 있는 아산에서 지냈으며,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고 무과를 준비했다.
낙방을 딛고 시작한 무관 생활
27세이던 1572년, 이순신은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다. 시험 도중 말이 거꾸러지며 낙마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기절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곁에 있던 버드나무의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맨 뒤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왼발을 다친 그는 결국 낙방했지만 무예 연마를 포기하지 않았다. 4년 뒤인 1576년 3월 22일, 32세에 보인 신분으로 식년시 무과 병과 제4인에 급제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특별히 늦은 나이의 급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식 직책이 아닌 훈련원 봉사 실습생, 즉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76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되었고, 1579년에는 해미에서 10개월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다. 이때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절했다. 1579년 12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 군관으로 옮겼고, 1580년 7월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해당하는 발포진의 수군만호가 되었다. 문반 가문에서 성장한 인물이 북방과 내륙의 군영을 거쳐 수군 지휘관으로 경험을 넓혀 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발포수군만호로 근무할 때 전라좌수사 성박은 거문고를 만들 목적으로 관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이순신은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사사로운 목적에 사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고, 그 일로 성박의 미움을 받았다.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발포·여도·사도·녹도·방답진을 점검하면서 다른 네 포구의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발포의 세 명만 보고했다. 이순신이 다른 포구의 결과까지 조사해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장계를 회수했다. 이용이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기자 전라도도사 조헌이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해 고과가 수정되었다. 훗날 이용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함경남도 남병사로 옮긴 뒤 그를 군관과 건원보 권관으로 추천했다.
녹둔도에서 드러난 책임과 지휘력
1582년 서익의 군기 점검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한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 함경남도병사 군관, 건원보 권관과 훈련원 참군을 거쳤다. 1583년 11월 15일에는 부친상을 당했다. 1586년 사복시 주부가 된 뒤 조산보 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로 부임해 북방 국경에서 여진족 방어와 둔전 관리를 맡았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을 때에는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 수 없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관직 생활 초반부터 사적인 청탁이나 권세보다 맡은 직무의 원칙을 앞세운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1587년 가을 녹둔도에 풍년이 들자 이순신은 9월 1일 경흥부사 이경록과 군대를 이끌고 추수 작업에 나섰다. 추도에 살던 여진족은 미리 화살과 병기를 숨겨 두었다가 조선군을 기습했다. 조선군 11명이 전사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당했다. 포로 규모는 160여 명으로 서술되며, 문책 과정의 기록에는 106명으로 적힌 내용도 전한다. 이일이 물러나는 가운데 이순신은 이경록과 현장에 남아 싸웠고, 수십 명의 병사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방어한 뒤 반격해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이순신은 기습 이전부터 여진족의 침입을 예상해 북병사 이일에게 여러 차례 추가 병력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일은 전투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돌렸고, “적호가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극형을 주장했다. 선조는 한 번의 실수에 사형은 지나치다며 장형 뒤 백의종군하게 했고, 공을 세워 죄를 갚을 기회를 주도록 했다.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군복과 직책 없이 복무하다가 1588년 두 번째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꾀어 사로잡은 공으로 사면되어 복직했다.
전라좌수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전라도감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과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지냈다. 1589년 비변사가 무신을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채용하자 이산해와 정언신 등의 추천을 받았고, 그해 전라도 도순찰사의 군관과 무겸 선전관을 거쳐 12월 정읍현감이 되었다. 정읍현감 재직 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찬을 받았다. 류성룡의 천거도 그의 등용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정은 고사리진첨사와 만포진첨사에 임명하려 했지만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논핵 때문에 한때 인사가 개정되기도 했다.
1591년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의 군사적 요충지에 임명해 공을 세우게 하라고 지시했다. 대신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관직 단계를 거쳐 승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종6품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은 종4품 진도군수에 임명되었고,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로 옮겨졌다. 다시 가리포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576년 무과 급제 후 동구비보 권관에서 출발해 여러 군관직과 만호직, 지방관을 거친 경험이 남해안 수군을 지휘하는 자리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이어진 왕조이며,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직후 일본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그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전쟁에 참전했고, 1593년에는 조선 수군의 핵심 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부하를 통솔하는 지도력과 뛰어난 지략, 탁월한 전략, 능수능란한 전술을 바탕으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한 차례의 승리에 머무르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를 이끌며 해상 전투를 수행한 데 있다.
열세를 뒤집은 귀환과 노량의 최후
1597년 정유재란 직후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크게 패하자 조정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했다. 이순신에게 돌아온 임무는 패전으로 무너진 조선 수군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그는 남아 있던 전력을 수습했고, 같은 해 9월 불과 13척의 배를 지휘해 왜군 함선 133척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적선 31척을 격파했다. 수적으로 극심한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 지휘와 전술로 전세를 바꾼 이 승리는 이순신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순신은 이듬해 3월 수군의 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둔전을 마련했다. 전투만 지휘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군영과 생산 기반까지 정비한 것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는 적선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양력으로는 1598년 12월 16일이었다.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후퇴하는 적 함대를 추격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은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수군 지휘관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전사한 뒤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덕풍군에 추봉되었다. 광해군 때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을 통솔하고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는다. 오늘날에도 이순신이 기억되는 까닭은 승리의 수치뿐 아니라, 파직과 투옥, 백의종군과 재기용을 거치면서도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열세의 수군을 다시 일으켜 끝내 전장에서 생을 마친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