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을 세우다

이황,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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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은 1502년 1월 13일, 음력으로는 1501년 11월 25일에 태어나 1571년 1월 13일, 음력 1570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율리우스력으로 생몰일을 환산하면 각각 1502년 1월 3일과 1571년 1월 3일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퇴계’는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른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을 줄인 말이다. 사후에는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될 만큼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경북 안동부 예안현, 오늘날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과 춘천 박씨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식은 첫째 부인 문소 김씨와 사별한 뒤 춘천 박씨 박치의 큰딸과 재혼했다. 이식이 마흔 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해, 어머니는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집의 대문은 ‘성인이 임한 문’이라는 뜻의 성림문(聖臨門)으로 불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황이 태어난 지 불과 7개월 만에 마흔 살로 사망했다. 어린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 박씨의 보살핌 아래 성장해야 했다.

집안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 생활이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는 일찍부터 상실이 이어졌다. 형 온계 이해는 학자였으나 구수담의 일파로 연루되어 유배되던 도중 병사했다. 이황 자신도 첫째 부인 김해 허씨와 사별했고,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먼저 떠나보냈다.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도 겪었다.

밤낮을 잊은 독서와 성리학자의 형성

이황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아픔에 민감했다. 1508년, 여덟 살 때 둘째 형 이징이 칼에 손을 베자 형제 가운데 이황만 통곡했다. 어머니가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왜 네가 우느냐고 묻자, 그는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열두 살이던 1512년에는 안동부사를 지낸 숙부 송재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이우는 관직으로 바쁜 중에도 조카 이황과 동리의 청년들을 직접 가르쳤으며, 이황은 숙부의 조카인 동시에 문하생으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열네 살 무렵인 1514년부터는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도연명의 시와 그 사람됨을 흠모했고, 도연명과 주자를 삶의 본보기로 삼았다. 숙부에게 배운 뒤에는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스무 살 무렵인 1520년부터는 먹고 자는 일조차 잊을 정도로 밤낮없이 독서하며 《주역》 연구에 몰두했다. 지나친 독서는 건강을 해쳤고, 이때 얻은 병으로 이후 계속 잔병치레를 겪었다.

1527년에는 향시의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다.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려고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528년 소과 생원시에 급제했다. 1533년 성균관에서는 하서 김인후와 교유하며 끊임없이 토론하고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았다. 이 시기에 《심경부주》를 입수해 깊이 심취했으며, 노수신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지만,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의 문인이었던 노수신을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귀향길에는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가족에게 실천한 차별 없는 인애

이황의 삶에서 예와 인애는 책 속의 주장에 머물지 않았다. 1528년 스물여덟 살 때 첫째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내가 사망한 뒤에도 사위로서의 의리를 버리지 않고 홀로 남은 장모를 도우며 장모가 죽을 때까지 처가의 크고 작은 일을 챙겼다. 어린 두 아들을 돌보면서 학문에 전념하기 어려워 관습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은 살림을 맡고 두 아이를 친어머니처럼 보살폈다. 이황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친어머니와 똑같이 대하도록 가르쳤다.

1530년에는 권질의 딸 권씨와 재혼했다. 권씨의 집안은 사화와 유배의 참극을 겪었다. 할아버지 권주는 경상감사 재직 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평해에 유배되어 교살당했고, 할머니는 관노가 되었다. 아버지 권질도 연산군을 비방한 언문 투서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났으며, 기묘사화 뒤 무고로 일어난 옥사 때문에 다시 예안에 유배되었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참상을 겪은 권씨에게 정신적 후유증이 남았다는 사정을 들은 이황은 심사숙고한 뒤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혼례를 올렸다.

이황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아내를 임지마다 동행시키며 존중했다. 권씨가 제사상 음식을 먼저 먹고 배를 치마 속에 넣었을 때도 친척들 앞에서 따뜻하게 감쌌고, 제사가 끝난 뒤 배가 먹고 싶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깎아 주었다고 한다. 권씨가 해어진 흰 도포를 붉은 천으로 크게 기워 주어 문상 자리에서 지적을 받았을 때도 변명하지 않고 웃었을 뿐이었다. 권씨는 1546년 난산으로 사망했고 아이도 며칠 뒤 죽었다.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계모의 무덤 곁에서 시묘살이를 했으며, 이황도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여를 지냈다. 그는 첩에게서 난 아들 이적을 호적에 올리고 후손의 적서 차별을 염려해 족보에도 구별을 두지 못하게 했다.

조정의 관료와 물러나는 학자 사이에서

이황은 1534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1540년에는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는 등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중종 말년인 1543년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성묘를 명분으로 성균관 사성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연마했다.

조정은 그를 다시 불렀다. 1545년 6월 홍문관 전한이 된 이황은 일본과 강화를 맺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 김저와 같은 무리라는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으나, 곧 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면서 복관되었다. 이후 사복시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고, 1546년 사복시정을 거쳤다. 지제교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작성했다는 이유로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받았지만, 대제학 신광한의 변호로 처벌을 면했다.

1546년 8월 교서관 교리를 거쳐 1547년 7월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했으나, 한 달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의빈부 경력 등에도 임명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토계 인근에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그는 ‘동방의 주자’, ‘이부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주자 연구와 신분을 넘어선 학문 공동체

이황은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고,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대성리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를 완독했으며, 이언적과 조광조의 저술도 탐독했다. 사서육경과 주자 원문에 대한 해석과 주해, 자신의 견해를 풍부하게 남긴 이언적의 저술을 높이 평가한 반면, 조광조의 저술과 시문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에는 당황하기도 했다. 결국 주자의 글을 직접 읽겠다고 결심하고 《주자대전》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곳을 수소문했다.

1543년 마침내 입수한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 다시 간행된 가정간본의 복각본이었으며, 그 가정간본은 성화간본을 수정하고 보충한 판본이었다. 이황은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해 완독했다. 또한 이언적과 이현보에게 편지를 보내 생각을 주고받았고, 기대승과도 서신으로 논쟁했다. 그는 자신의 나이나 경력을 앞세우지 않고 학문적 내용만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이황과 기대승의 편지 논쟁은 후대 사류들의 화제가 될 만큼 중요한 학문적 교류로 남았다.

그의 학문은 신분의 벽도 넘었다. 안동의 대장장이 배순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몰래 수업을 들었다. 배순은 쇠와 유기를 다루는 장인으로, 만든 그릇이 비뚤거나 흠이 있으면 시장에 내놓지 않았고 누군가 흠 있는 그릇을 원하면 싼값에 팔았다. 이황이 강의 내용을 묻자 배순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답했다. 그 열정에 감복한 이황은 배순을 정식 제자로 받아들였다. 배순은 풍기로 이사한 뒤에도 스승을 찾았고, 이황의 부음을 들은 뒤 3년상을 치렀으며 직접 금속 철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소수서원 사액과 도산서당, 『성학십도』

1548년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자 상피제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명종의 친필 사액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들었고, 이는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됐다. 지방관으로서 향약과 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힘썼고, 퇴청 뒤에는 문하생을 가르쳤다.

1552년 다시 내직으로 불려 홍문관 교리와 시독관이 됐지만, 이후 성균관 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될 때마다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53년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서는 서자라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한다며 서얼 허통을 지지했다. 1557년 도산서당을 세우기 시작했고, 1560년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을 지은 뒤 아호를 도옹으로 고쳤다.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며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했다. 출사 요청이 계속 거절되자 명종은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병풍을 만들어 두었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됐다.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 《심경석의》와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가 이 시기의 대표 저술이다. 기대승과 벌인 사단칠정 논쟁은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가 됐다. 선조 즉위 뒤에는 대제학·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풀어 쓴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1570년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했으나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1571년 1월 13일(음력 1570년 12월 8일) 안동 토계동에서 향년 70세로 숨을 거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졌다. 1610년 성균관 문묘에 종사됐고,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그를 제사하고 있다.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으로 남은 이름

이황의 학맥은 훗날 조선 정치와 사상사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동서 분당 뒤 그의 학맥은 동인의 핵심이 되었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질 때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을, 조식의 제자들은 북인을 형성했다. 일부 북인 역시 그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학문적 스승인 동시에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로 존중되었다. 다만 그의 중심은 권위나 조건, 편견을 앞세우지 않는 연구와 토론에 있었다. 연령과 경력을 내세우지 않고 기대승과 논쟁하고, 대장장이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인 행적이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향은 조선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황의 저술 가운데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었으며, 그 책들은 일본 성리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이뤘다. 그는 이언적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주자의 저술을 치밀하게 읽고, 동료 학자들과 편지를 교환하며 자신의 학문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오늘날 이황이 기억되는 까닭은 방대한 독서와 성리학 연구만이 아니다. 아픈 형을 보고 함께 울었던 어린아이의 마음, 먼저 떠난 아내의 가족을 끝까지 돌본 의리, 정신적 어려움을 겪은 둘째 부인을 존중한 태도, 생모와 계모 및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 신분이 낮은 장인의 배움까지 인정한 자세가 그의 학문과 나란히 전해진다. 이황은 지식을 축적한 학자를 넘어 자신이 배운 예와 인애를 가족과 제자에게 실천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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