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첨단산업 경쟁력 위해 노동 유연화·이공계 정원 확대 추진

일본, 첨단산업 경쟁력 위해 노동 유연화·이공계 정원 확대 추진

성장전략의 초점이 된 ‘사람’과 ‘제도’

2026년 4월 19일 일본 정부가 내놓은 성장전략의 핵심은 단순한 산업 지원이 아니라 노동시장 구조와 대학 정원 체계를 함께 바꾸는 데 맞춰져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19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인공지능(AI)·반도체·양자 등 지난해 선정한 17개 성장 전략 분야의 민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와 인재 육성을 연계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재량근로제로 대표되는 유연한 노동 방식 도입을 성장 전략 분야에서 본격 검토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의 이공계·보건 계열 정원을 전체의 50%까지 확대하는 구조 개편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노동과 교육을 따로 떼어 손보는 것이 아니라, 산업정책의 공급 측면을 사람의 이동과 양성으로 동시에 뒷받침하겠다는 발상에 가깝다.

이 조합은 일본이 지금 직면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첨단산업 투자 경쟁은 빨라지고 있지만, 이를 실제 생산성과 기술 우위로 연결할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 동시에 기존의 경직된 고용 관행은 신산업이 필요로 하는 속도와 배치의 유연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일본 정부는 성장 전략을 예산이나 보조금이 아니라 노동제도와 인력 공급 체계의 재설계 문제로 옮겨놓고 있다.

왜 일본은 지금 노동 유연화를 꺼내 들었나

일본 정부가 성장 전략 분야에서 유연한 노동 방식을 연내 결론 목표로 검토하겠다고 한 것은, 첨단산업 경쟁이 장기 연구개발 못지않게 인력 운용의 속도전이 됐다는 판단과 맞닿아 있다. AI와 반도체, 양자 기술은 단순히 설비만 갖춘다고 경쟁력이 생기지 않는다. 프로젝트 단위의 업무, 고숙련 인재의 신속한 배치, 연구개발과 생산현장의 긴밀한 연계가 동시에 요구된다.

문제는 일본의 전통적 고용 시스템이 이런 요구와 자주 충돌해 왔다는 점이다. 장기 고용과 직무 경계가 상대적으로 흐릿한 고용 관행은 안정성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었지만, 특정 성장 분야에 인력을 집중 배치하거나 성과와 전문성에 맞춘 탄력적 운용을 하기에는 제약이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정책 방향은 그런 구조적 한계를 정면에서 다루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만 일본 정부가 강조하는 표현을 보면, 단순한 규제 완화만을 밀어붙이려는 접근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보도에 따르면 노동 유연화는 근로자의 적절한 처우 확보 방안 마련과 병행해 검토된다. 이는 일본 정부도 유연화가 곧바로 노동조건 불안정화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번 개편의 쟁점은 ‘유연성 확대’ 그 자체보다, 그 유연성을 어떤 안전장치와 함께 설계하느냐에 있다.

대학 정원 50% 확대가 뜻하는 산업정책의 이동

대학의 이공계·보건 계열 정원을 50%까지 확대하는 구상은 일본이 인력 양성 문제를 단기 처방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공급 구조 전환으로 보고 있다는 신호다. 산업정책이 성공하려면 기업 투자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감당할 인재 저변이 넓어져야 한다. 특히 AI·반도체·양자와 같은 분야는 대학과 대학원, 연구기관, 기업의 채용 구조가 연결돼 움직여야 실제 효과가 난다.

여기서 보건 계열이 함께 거론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일본 정부가 단순히 제조업 중심의 기술인력만이 아니라 고령화 사회의 수요, 디지털 헬스케어, 바이오와 의료 시스템 전반의 전문 인력 확충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이번 정원 재편은 특정 산업 한두 곳의 인력난 해소가 아니라, 일본 경제의 성장 분야를 둘러싼 인적 기반을 더 넓게 바꾸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 같은 방식은 동시에 일본의 우선순위 변화도 말해준다. 과거에는 산업 경쟁력 강화가 기업 지원, 수출 확대, 통화정책과 결합해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교육 시스템에서 어떤 전공과 인력이 늘어나는가가 곧 국가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첨단산업 패권 경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연구인력과 기술인력의 절대 규모 자체가 전략 자산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17개 전략 분야가 보여주는 일본의 계산

일본 정부가 지난해 선정한 17개 성장 전략 분야는 이번 조치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보도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된 AI·반도체·양자는 모두 기술 주권, 산업 안보, 생산성 제고와 직결되는 분야다. 이는 일본이 더 이상 성장 전략을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 유지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차세대 기술을 둘러싼 국제 질서 변화에 대응하는 문제로 보고 있음을 뜻한다.

특히 반도체와 AI는 공급망 재편과 직결된다. 국가 간 기술 블록화가 심해지고, 연구개발·설계·생산·인재 확보 경쟁이 동시에 전개되는 환경에서는 정부가 민간 투자만 기다릴 수 없다. 노동시장 제도와 대학 정원 조정이 이번 전략의 전면으로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병목이 풀리지 않고, 결국 사람과 제도가 따라오지 못하면 투자 효과가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조치는 ‘산업 육성책’이면서 동시에 ‘병목 제거책’이다. 일본 정부가 성장 전략 분야에 재량근로제 등 유연한 방식 도입을 검토하는 것은 현장에서 느끼는 제도적 마찰을 줄이려는 시도이고, 정원 확대는 중장기 인력 부족 문제를 완화하려는 장치다. 단기와 중장기 해법을 한 틀에 담으려는 것이다. 다만 실제 효과는 제도 발표 자체보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대학과 기업, 부처 간 조정이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다.

정책의 강점과 동시에 드러나는 한계

이번 정책 방향의 강점은 분명하다. 일본이 성장 전략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을 비교적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산업은 설비 투자, 규제 환경, 인재 양성, 노동 운용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한 축만 강화해서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이공계·보건 인력 확대를 패키지로 접근한 것은 그런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하다. 우선 ‘유연화’는 언제나 해석의 충돌을 낳는다. 기업에는 신속한 인력 운용 수단으로 보일 수 있지만, 노동자에게는 근로시간 통제 약화나 보상 체계 불안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처우 확보 방안과 병행하겠다고 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제도 설계가 모호하면 성장 전략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대학 정원 확대 역시 숫자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교수진과 연구 인프라, 산업 현장과의 연계, 졸업 후 고용의 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원 확대는 외형적 지표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첨단산업 분야는 단기간에 교육 품질을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개편의 성패는 정원 규모보다 교육 내용과 산업 수요의 정합성을 얼마나 맞추느냐에 달려 있다.

국제 경쟁의 언어로 바뀌는 일본의 내치

이번 움직임이 국제 뉴스로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일본의 국내 정책 변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과 중국, 유럽이 모두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인력과 기술, 공급망 경쟁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노동·교육 개편은 동아시아 산업 질서에도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 일본이 인재 공급 체계를 재정비하고 노동 운용의 유연성을 높인다면, 역내 기업 유치와 공동 연구, 기술 협력 구도에도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는 이 움직임을 단순한 일본 내부 개혁으로만 보기 어렵다. AI와 반도체, 양자 기술은 한국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는 분야다. 일본이 제도 개편을 통해 인재 확보 경쟁력을 높이려 한다면, 앞으로는 기업 보조금이나 세제 지원 못지않게 교육 체계와 노동시장 설계가 경쟁의 핵심 변수로 떠오를 수 있다. 첨단산업 경쟁이 공장과 장비의 싸움에서 사람과 제도의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성장 전략을 점점 더 ‘속도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경직된 제도는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일본 정부가 연내 결론을 목표로 노동 유연화를 검토하고, 대학 정원 구조 조정까지 함께 추진하는 것은 그 속도전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신호다. 실제 제도화 과정에서 진통은 불가피하겠지만, 이번 발표는 일본이 첨단산업 경쟁의 승부처를 자본이 아니라 인력 구조와 제도 설계에서 찾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남는 질문은 실행력이다

정책 방향은 뚜렷하지만, 이제 남은 질문은 실행력이다. 일본성장전략회의에서 관계 각료들에 대한 검토 지시가 이뤄질 것으로 관측되는 만큼, 향후 쟁점은 선언이 아니라 세부 제도 설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성장 전략 분야를 어디까지 폭넓게 인정할 것인지, 유연한 노동 방식의 적용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처우 보장 기준을 어떤 수준에서 마련할 것인지가 핵심 논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대학 정원 확대 역시 중앙정부의 방침만으로 매듭지어지기 어렵다. 실제 현장에서는 대학의 수용 역량, 지역 간 교육 불균형, 산업계 수요와 교육 과정의 접점 같은 문제가 동시에 제기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정책은 발표 시점보다 이후의 조정 과정이 더 중요하다. 수치 목표가 크기 때문에, 조정의 속도와 정밀성이 부족하면 정책의 명분과 체감 효과 사이 간극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조치는 일본이 첨단산업 경쟁을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반의 재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이공계·보건 인력 확대는 각각 별개의 개혁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다. 누가 미래 산업을 움직일 것이며, 국가는 그 인력을 어떤 제도로 뒷받침할 것인가. 일본은 지금 그 질문에 국가 차원의 구조개편으로 답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