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훈 은퇴가 한국 농구에 던진 과제, 원클럽 레전드 이후를 묻다

함지훈 은퇴가 한국 농구에 던진 과제, 원클럽 레전드 이후를 묻다

함지훈의 은퇴가 한 선수의 작별에 그치지 않는 이유

2026년 4월 9일, 울산 현대모비스의 ‘영원한 12번’ 함지훈이 18시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난다는 사실은 단순한 은퇴 뉴스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날 나온 작별 인사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 한국 프로농구가 지난 20년 동안 어떤 방식으로 버텨왔고, 또 앞으로 무엇을 잃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사건에 가깝다. 한 구단에서만 18년을 뛰며 리그의 전술 변화, 외국인 선수 제도 변화, 샐러리캡 구조, 세대교체 압박을 모두 통과한 선수는 KBL 역사에서도 극히 드물다.

함지훈은 화려한 득점왕형 스타와는 다른 궤적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 농구 안에서 그의 존재감은 숫자로도 분명하다. 18시즌이라는 시간, 두 자릿수 시즌 평균 득점을 꾸준히 유지했던 생산성, 포스트업과 하이포스트 패싱, 수비 로테이션 이해도, 그리고 플레이오프 같은 고압 국면에서의 경험치는 단순 누적이 아니라 팀 운영의 기준점이었다. 은퇴 발표 직후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는 본인의 표현은 담담했지만, 한국 농구가 잃는 것은 감성보다 구조적 안정성에 더 가깝다.

특히 KBL이 최근 몇 년간 20대 가드 중심의 속도전, 외국인 빅맨 의존 심화, 국내 장신 포워드 육성 정체라는 세 가지 흐름을 동시에 겪고 있다는 점에서 함지훈의 퇴장은 더 크게 읽힌다. 그는 느린 농구의 상징이 아니라,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 속도로 경기를 지배하던 유형의 마지막 세대였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국내 빅맨이 지금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의 은퇴는 ‘레전드의 퇴장’이면서 동시에 ‘육성 시스템의 빈칸’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18년 원클럽맨의 가치, 왜 지금 더 희소해졌나

한국 프로스포츠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18년 원클럽 커리어는 이제 매우 예외적인 사례다. 선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FA 시장이 활성화되고, 구단도 성적과 연봉 효율성을 더 차갑게 따지는 환경에서는 한 선수가 한 팀에서 커리어 전체를 마치는 일 자체가 희귀해졌다. 농구는 특히 로스터 숫자가 적기 때문에 전력 조정의 압력이 더 크다. 15명 안팎의 선수단에서 베테랑 한 명의 연봉과 출전시간은 곧바로 전술과 세대교체 문제로 연결된다.

함지훈의 원클럽 커리어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전성기 때 확실히 팀의 중심이었고, 중후반기에는 역할을 줄이면서도 가치가 유지된 드문 사례다. 많은 베테랑이 하락 곡선에서 로스터를 비우는 쪽으로 정리되지만, 함지훈은 주전, 조력자, 벤치 리더까지 역할을 단계적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은 구단의 배려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선수가 자신의 생산성과 한계를 정확히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또 하나 중요한 대목은 현대모비스라는 팀의 정체성이다. 현대모비스는 KBL에서 상대적으로 시스템 농구와 조직 수비 색채가 강한 팀으로 분류돼 왔다. 이 팀의 문화는 전술 수행능력이 높은 국내 빅맨을 유독 중시해왔고, 함지훈은 그 철학의 핵심이었다. 즉 그는 개인 기록을 쌓은 스타를 넘어, 한 구단의 경기 언어를 구현한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은퇴는 선수 한 명의 공백이 아니라 팀 문법의 일부가 사라지는 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록보다 더 큰 자산이었던 ‘연결 능력’

함지훈을 분석할 때 종종 간과되는 것은 그의 가치가 박스스코어의 합보다 컸다는 점이다. KBL에서 국내 빅맨은 대체로 두 종류로 평가받아 왔다. 골밑 마무리형이거나, 리바운드와 스크린 중심의 궂은일형이다. 함지훈은 여기에 잘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하이포스트에서 패스를 뿌리고, 수비가 수축되면 외곽으로 연결하고, 골밑 매치업이 열리면 직접 마무리하는 ‘연결형 빅맨’이었다. NBA식 표현을 빌리면 전성기 시절의 그는 팀 내 세컨드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웠다.

이 능력은 한국 농구에서 특히 중요했다. KBL은 외국인 선수의 득점 비중이 높고, 국내 가드는 압박 수비에 시달리는 경향이 강하다. 이때 전방에서 볼을 받아 공격을 재조립할 수 있는 국내 빅맨은 전술적 숨통을 틔운다. 함지훈은 단순히 공격 옵션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니라, 볼 운반과 세트오펜스 사이의 끊기는 구간을 메워줬다. 그래서 그의 존재가 있을 때 현대모비스는 공격 전개가 막혀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수비에서도 비슷한 가치가 있었다. 폭발적인 블록슛 숫자나 눈에 띄는 하이라이트는 적었지만, 도움수비 타이밍과 위치 선정은 오랜 기간 팀의 기준이었다. KBL에서 수비는 개인 능력보다 로테이션 이해도의 비중이 크고, 특히 국내 빅맨이 이를 놓치면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함지훈은 스피드가 떨어진 뒤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는데, 이는 운동능력이 아니라 판단력으로 버틴 결과다. 결국 그의 진짜 자산은 득점이나 리바운드보다 경기의 연결점을 아는 능력이었다.

현대모비스가 당장 마주할 전력 공백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보면 은퇴 선수 1명의 이탈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모비스 입장에서 함지훈의 공백은 최소 세 층위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전술 공백이다. 하프코트에서 국내 선수가 볼을 받아 패싱 허브 역할을 하는 장면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리더십 공백이다. 긴 시즌 동안 연패, 부상, 외국인 선수 교체 같은 변수를 관리하는 데 베테랑의 안정감은 숫자로 계산하기 어렵다. 셋째는 육성 공백이다. 젊은 포워드와 빅맨들이 현장에서 직접 학습할 수 있는 기준점이 사라진다.

현대모비스는 당장 공격 구조를 더 가드 중심으로 재편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리그 전반의 흐름과도 맞는다. 최근 KBL은 템포를 올리고, 픽앤롤 빈도를 높이고, 외곽 슛 볼륨을 늘리는 방향으로 이동해 왔다. 문제는 이런 전환이 항상 효율적이진 않다는 점이다. 플레이오프처럼 수비 강도가 높아지는 구간에서는 결국 공을 잠시 멈추고, 세트를 다시 설계하고, 미스매치를 읽어내는 선수의 가치가 커진다. 함지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유용했던 자원이었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국내 4번 포지션 수급이다. 최근 한국 농구는 신장이 크면서도 패스를 읽고 외곽 수비를 버텨낼 수 있는 포워드 자원이 부족하다. 대학 무대에서 올라오는 장신 자원들 역시 외곽 기술과 골밑 기술 사이에서 애매한 경우가 많고, 프로에서는 즉시전력감보다 장기 프로젝트로 분류된다. 이런 환경에서 함지훈의 은퇴는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대체재가 뚜렷하지 않은 핵심 역할의 소멸이다. 현대모비스가 다음 시즌 로스터 구성에서 가장 고민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KBL 전체가 읽어야 할 메시지, 국내 빅맨 육성의 정체

함지훈 은퇴 뉴스가 특정 구단 팬의 향수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이 사건이 KBL 전체의 병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 농구는 오랫동안 가드 자원 배출에는 비교적 강점을 보여왔지만, 국내 빅맨 육성에서는 반복적으로 정체를 겪었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리그 경쟁력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국내 장신 자원의 공격 책임을 축소시킨 측면도 있다. 공격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외국인 선수에게 맡기는 구조가 고착되면, 국내 빅맨은 스크린·리바운드·수비만 요구받고 성장의 폭이 제한된다.

그 결과 프로에 올라온 장신 선수들이 하이포스트 패싱, 짧은 롤 이후의 판단, 골밑에서의 발 사용 같은 세밀한 기술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단순 개인 능력 문제가 아니라 육성 구조의 문제다. 중고교와 대학 단계에서 경기 결과에 쫓기면, 장신 유망주를 다기능 자원으로 키우기보다 가장 안전한 역할만 수행하게 만들기 쉽다. 함지훈은 예외적으로 그런 한계를 뚫고 나온 선수였지만, 예외가 반복되지 못하면 시스템은 실패한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 대목을 주목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국내 빅맨이 공격 조립에 참여하지 못하면, 리그 전체 전술 다양성이 줄어든다. 결국 모든 팀이 비슷한 방식의 픽앤롤, 비슷한 방식의 외국인 의존형 공격으로 수렴한다. 팬 입장에서는 경기의 차별성이 떨어지고, 대표팀 차원에서는 국제무대에서 더 큰 문제가 생긴다. FIBA 무대에서 한국 농구가 늘 지적받아온 약점 중 하나가 바로 포워드·빅맨 포지션의 다기능성 부족이기 때문이다. 함지훈의 은퇴는 한 명의 레전드 퇴장인 동시에, 왜 그 뒤를 잇는 유형이 잘 보이지 않는지 자문하게 만드는 계기다.

베테랑의 퇴장은 감성 소비가 아니라 산업의 과제다

한국 스포츠에서 레전드 은퇴는 자주 ‘추억’의 언어로 소비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산업적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이런 선수의 퇴장 이후 구단과 리그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전수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산화하느냐는 점이다. 18년을 한 팀에서 뛴 선수가 남기는 것은 기록집의 몇 줄이 아니라, 경기 이해도와 훈련 습관, 시즌 관리 노하우, 젊은 선수와의 소통 방식 같은 비가시적 자본이다. 이것을 흩어지게 둘 것인지, 시스템 안에 남길 것인지가 중요하다.

현대모비스와 KBL은 여기서 더 적극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소년 및 프로 연계 육성 프로그램에서 함지훈 같은 유형의 빅맨이 왜 희귀했는지 분석하고, 실제 사례를 코칭 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다. 단순 은퇴식과 영구결번 논의에 그치지 않고, 포지션별 기술 교육 체계에 레전드의 경험을 편입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해외 리그도 은퇴 레전드를 프런트, 코치, 선수개발 부문으로 흡수하며 팀 문화를 재생산한다. 한국 농구 역시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산업적 학습으로 연결해야 한다.

관중 감소와 관심 분산이 반복되는 한국 프로농구 환경에서, 서사 자산을 어떻게 운영하느냐도 중요하다. 스타는 단순히 티켓 판매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리그의 기억을 만든다. 함지훈 같은 원클럽 레전드는 팬에게 팀과 리그를 장기적으로 연결하는 매개다. 이런 자산이 사라질 때 리그는 단순히 한 선수의 출전시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연속성을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은퇴는 끝이 아니라, 리그가 자기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시험하는 순간이다.

앞으로의 전망, ‘함지훈 이후’를 누가 어떻게 메울 것인가

단기적으로는 현대모비스의 전력 재편이 가장 큰 관전 포인트다. 다음 시즌 팀이 백코트 비중을 더 높이고, 외국인 빅맨 활용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이 방식만으로 함지훈의 공백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공격 조립, 경기 흐름 조절, 어린 선수 안정화 같은 기능은 한 명의 유망주가 즉시 가져오기 힘들다. 결국 현대모비스는 로스터 보강과 함께 내부 육성의 속도를 동시에 끌어올려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리그 전체가 국내 포워드·빅맨 육성의 기준을 다시 써야 한다. 단순히 높이만 있는 선수가 아니라, 패스와 판단, 수비 전환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장신 자원을 길러내지 못하면 함지훈 같은 유형은 계속 ‘마지막 세대’로만 남게 된다. 이는 클럽의 성적 문제를 넘어 대표팀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아시아 무대에서 일본은 스페이싱과 기술형 빅맨 육성에 공을 들였고, 중국은 높이 자원을 여전히 다층적으로 확보한다. 한국이 이 사이에서 버티려면 국내 빅맨 육성 철학을 더 정교하게 바꿔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함지훈의 은퇴는 KBL에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선수는 점점 드물어지는가, 왜 국내 장신 자원은 전술의 중심으로 자라나기 어려운가, 왜 리그는 레전드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데 소극적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2026년 4월 9일의 작별은 분명 한 시대의 끝이다. 그러나 그 끝을 단지 눈물과 박수로만 소비한다면 한국 농구는 또 하나의 자산을 흘려보내게 된다. 반대로 이 은퇴를 육성, 전술, 산업 전략의 재설계로 연결한다면 함지훈의 마지막 경기는 한국 농구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