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에서 자란 ‘응칠’, 안중근이 되기까지
안중근(安重根)은 조선(1392~1897) 말기인 1879년 9월 2일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뜻으로 어린 시절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렸고, 해외에서 활동할 때에도 이 이름을 자주 사용했다. 태명은 안응칠, 일명은 다묵(多默)이었으며, 뒤에 천주교 세례명으로 사도 토마에서 따온 토마스, 곧 도마를 받았다. 본관은 순흥이고 고려(918~1392)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으로 전해진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 명예현감을 지냈고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는 여행기에 안인수와 여섯 아들, 가족 36명이 해주에서 함께 살았으며 안인수가 8억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측은 그가 간악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았고 탐욕스럽다는 취지로 평가했지만,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황해도 안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대지주이자 미곡상이었던 할아버지 덕분에 안중근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다만 그의 가계는 5대조 이전으로 올라가면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순흥 안씨 족보에는 17대조 안려가 생원으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고 하나, 1845년 족보에는 ‘진사이며 후사가 없다’고 적혔고 1864년 족보에는 진사라는 내용만 보인다. 안려의 양자로 안순복이 들어가 안효신을 낳았다는 계보는 1918년과 1936년 족보에서 나타난다. 김택영·이건승과 김창숙 등은 안중근의 선조를 해주의 향리 또는 주리로 보았다. 5대조 안기옥과 그의 네 아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했고, 이후 여러 후손도 무과와 군직에 진출했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안태건은 1891년 24세에 증광시 진사 3등으로 합격했다. 이는 경제력을 갖춘 향리 가문이 과거를 통해 지위를 높여 간 과정으로 해석된다.
사냥과 서당, 격변 속의 소년기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을 좋아했다. 집을 자주 드나들던 포수들의 영향을 받아 명사수로 이름이 났지만,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일도 잦았다. 차분히 앉아 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가 응칠 대신 ‘무거울 중’과 ‘뿌리 근’을 써 중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 예닐곱 살 무렵부터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8~9년 동안 한문을 배웠으나,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사냥에 빠져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족을 따라 이주해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초빙한 훈장에게 배웠다. 그러나 사서오경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통감》 10권 정도까지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소년기는 안정된 집안 환경과 학업뿐 아니라 정치적 격변에 따른 피신, 무예와 사냥이 함께 자리한 시기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안태훈은 산채에서 양성하던 사병을 바탕으로 창의했고,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을 받아 산포군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소년 안중근도 이 부대에 참가해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훗날 독립운동가가 된 김구가 당시 동학군으로 활동했으며 안태훈의 보호를 받은 적이 있다. 이 시기에 안중근도 김구와 안면은 있었으나, 두 사람이 특별히 가까운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천주교 신앙과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1895년 천주교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배웠고,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했다. 프랑스 출신 조제프 빌렐렘 신부, 한국명 홍석구에게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설명이 있으나, 뮈텔 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프랑스어 공부를 중단했다. 이후 잠시 교회의 총대를 맡았고, 1,000명 이상의 계원이 돈을 출자해 추첨이나 입찰로 융통하는 만인계의 자금을 관리하는 채표회사를 세워 사장이 되었다.
1904년에는 아버지와 청나라 의사 서원훈 사이의 다툼에 개입했다가 한·청 외교 문제에 휘말렸다. 안태훈이 치료를 위해 친우 이용일과 서원훈을 찾아갔다가 발로 가슴을 걷어차였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무기를 들고 서원훈을 붙잡아 길가에서 심하게 구타했다. 청국인들이 보복에 나서고 청나라 영사가 대한제국 정부에 공식 문제를 제기하자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압송 도중 괴한들이 순검을 공격해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출했고, 순검 한 명은 얼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외무부는 조사 끝에 두 사람의 죄상이 무겁다고 판단했으며, 황해도관찰사는 이들이 미리 달아나 체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다만 《안응칠역사》에는 안중근이 경성의 외무부에 청원하고 진남포 재판소에서 서원훈과 재판을 받아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며, 뒤에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했다는 다른 서술이 실려 있다. 이처럼 사건 기록에는 차이가 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1897~1910)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상하이로 갔지만, 현지 유력자와 천주교 신부들에게 협조를 거절당했다. 부친상을 치르던 중 3년상을 마치지 않고 1906년 3월 진남포로 옮겨 석탄상회를 운영했으나 사업이 잘되지 않았다. 그는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회사를 정리하고 집안의 전 재산을 들여 삼흥학교를 세웠으며, 천주교 계열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계몽운동에서 항일 의병전쟁으로
안중근은 교육만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통한 국권 회복에도 참여했다. 1907년 서상돈 등의 주도로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국채보상기성회 회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관서지부장에 임명됐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학교 설립과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그가 무장투쟁 이전부터 교육과 시민의 조직적 참여를 독립의 기반으로 보았음을 보여주는 행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이유로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 체결과 군대 해산이 이어지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안중근은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해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가담하고,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며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황해도 의병대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운 뒤에는 직접 국외에서 부대를 만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계동청년회에 가입했고 곧 임시사찰로 선출됐다.
1908년 7월 그는 전제덕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부하 100여 명을 이끌었다.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이어 국내 진공작전을 벌여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렸지만, 얼마 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처참하게 패했다. 다른 의병들의 반대에도 안중근이 국제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고, 이것이 기습을 불러온 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 부대를 일으키려 했으나 비판 속에 부대가 해체됐다.
하얼빈 의거와 세계에 드러낸 항일 의지
패배와 부대 해체 뒤에도 안중근은 무장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9년 초 뜻을 같이하는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교육기관을 세우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계몽운동가가 국외 의병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나아간 과정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과 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이라는 연속된 위기 속에서 그의 투쟁 방식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SOURCE가 전하는 핵심 사실은 그가 항일 의병운동에 참여해 활동한 끝에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안중근의 이름과 한국인의 항일 의지는 국외에도 알려졌다. 그는 단순한 개인적 삶에 머물지 않고 교육운동, 경제적 국권 회복운동, 의병전쟁을 거쳐 대한제국의 독립 문제를 행동으로 제기한 정치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평가받는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처형됐다. 그의 생애에는 부유한 향리계 가문의 후손이라는 배경, 학업보다 사냥과 무예를 즐겼던 성장기, 동학 농민군 진압 참여, 천주교 입교, 청나라 사람과의 폭력 사건, 학교 설립과 국채보상운동, 의병 지휘와 패전이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력을 사실대로 살필 때, 그는 처음부터 완성된 영웅이라기보다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국권 회복의 방법을 거듭 모색하고 실천한 인물로 이해된다. 오늘날에도 안중근이 기억되는 이유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교육과 계몽, 의병전쟁에 참여했고, 마침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한국인의 항일 의지를 세계에 알린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