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리스크 비용처리, 법원이 다시 그은 선
2026년 4월 18일 한국 경제가 받아든 중요한 신호 가운데 하나는 유가나 환율이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와 세무의 경계선에서 나왔다. 법원이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 15곳이 총수 일가 관련 수사 대응 과정에서 지출한 법률비용을 법인세 손금으로 인정해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부분 원고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한국 대기업들이 오랫동안 관행처럼 처리해 온 ‘총수 리스크의 회사 비용화’에 분명한 제동이 걸렸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지난달 31일 코리아세븐, 롯데쇼핑, 롯데지주 등 15개 계열사가 관할 세무서 10곳과 서울지방국세청을 상대로 낸 법인세 등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대부분 기각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롯데쇼핑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승소를 인정했다. 숫자로 보면 한 기업집단의 세무소송이지만, 의미는 그보다 훨씬 넓다. 회사 자금이 어디까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쓰인 것인지, 개인 방어와 기업 방어의 경계는 어디서 갈리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앞으로 기업 회계·세무·이사회 운영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지가 함께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단순히 특정 기업이 세금을 더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총수 또는 임직원에 대한 형사·검찰 수사가 벌어졌을 때 회사가 변호사비를 대신 부담하는 관행을 더는 포괄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점이 확인됐다. 법률비용의 성격을 따질 때 ‘그 수사가 회사 자체의 이익을 방어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형사상 책임을 방어하는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원칙이 재확인된 셈이다.
왜 이 판결이 경제 기사인가
겉으로 보기에 이번 사안은 법원 판결과 세금 분쟁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경제의 언어로 다시 보면 기업 비용의 인정 범위, 주주가치의 훼손 여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상충, 그리고 내부통제의 실효성까지 한꺼번에 건드리는 사안이다. 회사 돈의 사용 목적을 둘러싼 법원의 해석은 곧 기업의 비용 구조와 세후 이익, 배당 여력, 투자 여력, 그리고 시장 신뢰에 영향을 준다.
기업은 통상 사업과 관련한 소송비용, 자문비용, 방어비용을 비용으로 처리한다. 문제는 그 비용이 ‘회사 업무와 직접 관련된 비용’인지, 아니면 경영진 개인의 법적 책임을 가리는 비용인지가 불분명할 때다. 총수나 임원이 회사 의사결정 과정에서 수사를 받는 경우, 기업들은 종종 회사의 평판과 경영 연속성을 이유로 법률비용 부담의 정당성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 논리가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지면, 개인의 법적 리스크가 법인 재무제표 속 비용 항목으로 흡수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지점에서 경제적 문제는 선명해진다. 비용으로 인정되면 과세표준이 줄고 법인세 부담도 감소한다. 반대로 비용 인정이 부인되면 기업은 세금을 더 부담해야 하고, 그만큼 이익잉여금과 현금흐름에도 영향이 간다. 결국 ‘누구의 책임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는 조세 형평의 문제인 동시에, 기업집단 내부의 권한과 책임 배분 문제다. 이번 판결은 바로 그 책임의 귀속을 좀 더 엄격하게 보겠다는 메시지다.
재판부가 본 쟁점, 회사 이익과 개인 방어의 경계
재판부는 배임이나 횡령 등의 피의자인 회사 임직원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법률비용은 원칙적으로 회사 비용으로 차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예외는 남겼다. 비용 지출이 임직원 개인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범위 안에 있을 때만 회사 비용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이 문장은 앞으로 유사 사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될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기준이 중요한 이유는 현실의 사건들이 대부분 혼합형이기 때문이다. 총수 또는 경영진에 대한 수사는 종종 계열사 전반으로 확대되고, 압수수색이나 자료 제출, 내부보고 체계 점검, 투자자 설명 등 기업 차원의 대응이 함께 이뤄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개인 방어와 회사 방어가 완전히 분리돼 있지 않다고 주장할 유인이 크다. 반면 과세당국은 그 비용 상당 부분이 결과적으로 개인의 형사책임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면 법인 비용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번 판결은 그 회색지대를 좁히는 방향으로 읽힌다. 계열사들이 광범위한 검찰 수사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을 폈더라도, 그 지출이 실제로 회사 업무와 직접 관련됐는지, 또는 총수 개인을 방어하려는 성격이 강한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제한적으로 롯데쇼핑만 일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더 큰 함의를 가진다. 법원이 법률비용 전체를 일괄 부인하거나 일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회사별·사안별로 비용의 목적과 귀속을 세밀하게 나누어 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회계와 세무 실무가 달라질 가능성
이번 판결 이후 기업 실무에서 가장 먼저 달라질 부분은 비용 집행 단계의 문서화다. 앞으로는 법률자문이나 소송대응 비용을 집행할 때 그것이 누구를 위해, 어떤 회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어떤 절차에 따라 승인됐는지를 훨씬 더 촘촘하게 남겨야 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그룹 차원에서 포괄 계약을 맺고 계열사별로 나눠 처리하던 방식이 상대적으로 넓게 활용됐지만, 이제는 그 방식 자체가 세무상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이사회와 감사기구의 역할도 무거워진다. 회사 돈으로 외부 법률비용을 부담할 때, 해당 비용이 회사의 사업상 필요에 근거한 것인지, 이해상충 우려는 없는지, 사후에 과세 리스크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해진다. 특히 총수 일가나 핵심 임원 사건의 경우 사외이사·감사위원회가 실질적인 검토 없이 형식적으로 승인했다면, 향후에는 세무 문제를 넘어 내부통제 부실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회계감사 현장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예상된다. 외부감사인은 법률비용이 적정하게 계상됐는지, 관련 당사자 거래 성격은 없는지, 주석 공시 필요성은 없는지 더 민감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비용 인식 자체는 회계와 세법이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세무상 손금 부인 가능성이 높아지면 충당금 설정이나 법인세 비용 추정에도 보수성이 커질 수 있다. 판결 하나가 기업의 장부 작성 태도까지 바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 신뢰의 문제, 주주들은 무엇을 보게 되나
이번 판결은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에게도 적지 않은 의미를 던진다. 한국 자본시장에서 지배주주 리스크는 종종 기업가치 할인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그 핵심은 단지 총수 관련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비용과 후폭풍이 어느 순간 회사 전체의 부담으로 이전된다는 인식이다. 만약 개인의 방어비용이 회사 비용으로 계속 처리된다면, 그 부담은 결국 일반주주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번 판단은 단순한 세무 해석을 넘어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공정한가’라는 주주자본주의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회사 이익을 위한 방어라면 회사가 비용을 대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개인의 형사책임을 줄이기 위한 방어라면 그 비용을 법인에 전가하는 순간, 회사 자산이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됐다는 의심이 생긴다. 법원이 그 경계를 더 엄격하게 본 것은 투자자 신뢰 회복 측면에서 긍정적 신호로 읽힐 여지가 있다.
다만 시장은 동시에 현실적인 우려도 제기할 수 있다. 대기업 수사는 실제로 계열사 운영과 영업, 협력업체 관계, 금융기관 신용평가, 해외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다. 따라서 회사가 전혀 비용을 부담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기업 차원의 적절한 방어와 리스크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결국 앞으로 중요한 것은 ‘전면 허용’이나 ‘전면 금지’가 아니라, 회사 방어와 개인 방어를 구분해 각각의 비용을 정교하게 배분하는 기준을 실무에 안착시키는 일이다.
국세 행정과 사법 판단이 기업집단에 보내는 메시지
이번 사안은 국세 행정의 관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동안 과세당국은 총수 일가 또는 임원 관련 비용이 법인 손금으로 인정될 수 있는 범위를 좁게 해석해 왔고, 기업들은 경영활동과의 관련성을 들어 다퉈 왔다. 이번 판결로 적어도 1심 단계에서는 과세당국의 논리가 상당 부분 힘을 얻었다. 향후 비슷한 사건에서 세무조사와 과세처분의 기준이 더 엄격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은 지주회사, 핵심 사업회사, 비상장 계열사, 오너 일가 개인회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어느 법인이 어떤 자문료를 냈는지, 그룹 공통 대응 비용을 어떤 기준으로 나눴는지, 실제 수혜자가 누구인지가 불명확해지기 쉽다. 법원이 비용의 실질 귀속을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하면, 단순한 내부 정산표만으로는 방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 메시지는 다른 재벌그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사 대응, 승계 과정 자문, 오너 일가 관련 분쟁, 공정거래·조세·형사 사건 등에서 법률비용을 회사가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재점검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내부 규정이 모호하거나 승인 체계가 허술한 기업일수록 위험이 크다. 기업집단 차원에서 법률비용 집행 원칙을 명문화하고, 개인 관련 사건과 회사 관련 사건의 비용부담 기준을 분리하는 작업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될 수 있다.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오래된 숙제와 남은 과제
이번 판결을 한국 경제의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결국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총수 중심 경영 체제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회사가 어디까지 떠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빠른 의사결정과 강한 오너십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왔지만, 그 이면에는 오너 개인의 판단과 회사 자원의 경계가 흐려지는 구조적 문제가 반복돼 왔다. 법률비용 분쟁은 그 구조가 장부 위에서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기사로 전해진 재판부 판단은 감정적 비판보다 훨씬 건조한 언어로 쓰였지만, 경제적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회사의 이익을 위한 지출인지, 개인의 위험을 덜기 위한 지출인지 구분하라는 요구는 곧 한국 기업에 ‘권한만큼 책임을 개인화하라’는 주문과 같다. 이는 총수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회계·세무 원칙에 관한 이야기다.
앞으로 상급심 판단이 이어질 가능성은 열려 있고, 기업들도 각자 사안의 특수성을 들어 다투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이 남긴 방향성은 분명하다. 총수 일가 관련 법적 리스크를 회사 비용 속에 넓게 흡수하던 관행은 더 강한 설명 책임을 요구받게 됐고, 기업은 이제 ‘왜 회사가 이 돈을 내야 하는가’를 사후가 아니라 사전에 입증해야 하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과 고변동성의 압박 속에서 기업 신뢰를 더 중요한 자산으로 삼아야 하는 지금, 이 판결은 숫자 이상의 경고로 읽힌다.